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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ckout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부르심이 있기 전까지 인생은 그럭저럭 살기 좋았다. 아내 리앤과 함께 여러 해 동안 빈곤과 싸운 끝에 성공적인 중산층 가족으로 가는 기로에 서 있던 참이었다. 의학을 공부한다는 부르심에 반응해서 다시금 빈곤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일은 생각도 안 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비전을 통해 안일했던 삶과 당연한 의무에 게을렀던 일을 회개하게 하시더니 의사가 돼야겠다는 불타는 열정을 심어주셨다. 하지만 여전히 의대에 진학한다는 건 엉뚱한 생각을 넘어서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학창 시절의 성적으로는 면접조차 신청할 자격이 안 되는 처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그렇다고 가난하게 자란 아이가 끝내 성공하는 식의 뻔한 얘기로 흐른 건 아니었다. 치유의 사역으로 떠나는 여행은 사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누구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과 주님이 내게 보내주길 원하시는 사람들을 위한 그분의 응답이었다. 내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거부할 재간이 없었다. ‘보아라! 네가 돌봐야 할 사람들이다. 가서 그들을 어떻게 돌보는지를 배워라!’
의대에 기적적으로 합격함으로써 그 부르심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분명함이 증명됐다. 수업 첫날 강의실에 앉아 동기들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아이들은 여기에 올 자격이 있지만, 난 없어.’
그 자리에 내가 앉아 있는 건 순전한 은혜였다. 그리고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가족은 의대와 레지던트 기간이라는 ‘시련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로 나는 과 수석으로 졸업했다.
의대 4학년 때 내전이 막 끝난 모잠비크의 난민 수용소에서 자원활동을 하게 된 것도 주님이 이끄신 일이라고 믿는다. 그곳에서 비참하게 굶주린 사람들을 만나 울부짖으며 보낸 시간 끝에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삶을 살기로 했다. 시련의 용광로에서 굳어진 확신이었다. 2000년 케냐와 우간다에서 한 달을 보낸 후, 국제구호활동이 내 일생의 사명이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우리는 길섶에 임시로 지은 진료소에서 1만7천 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39일을 쉬는 날 없이 줄기차게 일하고 난 끝에 나는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고갈되고 말았다. 하나님께 이렇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제발 집으로 데려가 주세요. 나눌 게 이제 바닥났어요.”
하나님은 다시 나의 뜻과 반대로 응답하셨다. 이번에는 뉴욕 주 알버니 시 최악의 빈곤지역인 웨스트 힐에 작은 병원을 시작하는 비전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자랐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었다. 병원을 열고 그곳에 예배자와 기도의 전사를 초청해서 하나님의 치유가 꽃필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하는 것이 비전이었다. 그곳에서 내가 하는 일이란 기본적이고 정신적인 건강을 돌보고, 원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치유의 기도를 해주는 거였다. 병원에 다녀간 7만 명의 환자 중 기도를 거부한 이는 5명밖에 되지 않았다.
웨스트 힐의 일은 아주 고됐지만 영광스러웠다. 재정이 너무 부족해서, 그때그때 기적적으로 마련된 돈이 아니었다면 꼼작 없이 문을 닫아야 할 상황에 놓인 적인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내를 간호사로 고용한 건 임금을 주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고용할 엄두도 내지 못 했다. 나 역시 꼬박 11년을 월급 없이 일했으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기적적인 치유와 공급을 경험한 게 한두 번이 아니어서 일일이 기록할 수조차 없다. 오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병원은 끊임없이 성장했다. 2013년에 우리 ‘코이노니아 가정 의원’이 뉴욕 주가 인증하는 진단 및 처방 센터로 지정될 정도였다. 그리고 내게 처음으로 제대로 된 월급이 나왔다. 인생은 살 만했다!
‘호랑이 아줌마’와의 만남
하지만 최근, 코이노니아에서 14년을 일한 끝에, 환자들에게 쉽게 짜증을 내고 차갑게 대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모든 게 싫증 났고 모든 게 왜곡되어 보였다. 늘 거짓말에 당하고, 뜯기고, 이용당하는 일이 지긋지긋해졌다. 잇달아 일어난 내·외부적 갈등(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탓에 하나님이 처음 주신 부르심을 잊고 살았다.
우리 교회 목사님이 “죄인들의 벗 예수님”을 주제로 했던 설교를 들은 게 그때쯤이었다. 설교를 듣는 동안 나는 성령에 압도되어 울부짖으며 회개했다. 그리고 첫사랑대로 환자를 만날 때마다 주님을 찾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확신은 이틀 후 분노와 적대의 화신을 만났을 때 시험에 빠졌다. 이 환자(호랑이 아줌마라고 부르겠다)는 이미 두 곳의 다른 병원에서 퇴짜를 맞은 이력이 있었다. 유별나게 호전적이고 적의적인 행동 탓이었다. 몇 명의 의사들은 내게 전화까지 걸어와 이 여인을 조심하라고 귀띔했다. 진찰하는 내내 나는 호랑이 아줌마의 분노에 찬 눈초리와 비협조적인 태도를 겪으면서도 인내심을 붙잡으려 애썼다. 병원에서 당장 쫓아내는 일이 없도록 간신히 참고 또 참았다.
그리고 호랑이 아줌마가 재진을 받으러 오는 날이 다가왔다. 막 되찾았던 신념을 호랑이의 이빨에 빼앗길 판국이었다. 호랑이 아줌마가 재진을 빼먹기를 은근히 바랐다. 바쁜 도시의 일상이 늘 그런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 기대는 어긋났다. 진료 일정표 화면에 그녀의 이름이 어김없이 올라왔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그때 나는 환자의 건강보다는 나의 안녕에 관심이 더 많았다. 나의 인간적 연약함 때문에 성령이 방해를 받는 꼴이었다. 호랑이 아줌마의 풀이 꺾이길 바라는 심정으로 우선 의대 실습생을 먼저 보낸 뒤에 병원 휴게실로 피해 기도를 했다.
진료실에 들어가자 화가 난 그녀의 눈초리에 나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반감이 섞인 묘한 연민이 밀려왔다. 그리고 단순하고 평범한 질문에도 짜증을 내는 호랑이 아줌마 옆에 앉아 정성스럽게 진찰을 이어갈 수 있었다. 때때로 화를 벌컥 내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지만, 그 유혹을 이기는 일은 예전보다는 수월했다.
드디어 진료를 마쳤다. 컴퓨터에 처방전을 입력한 다음 의대 실습생더러 인쇄된 처방을 가져오도록 병원 사무실로 내보냈다. 호랑이 아줌마와 나만 단둘이 남은 진료실에는 적막감이 흘렀다. 실습생이 빨리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사실 환자의 진료 기록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왠지 성령이 그 질문을 하도록 강하게 부추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있으세요?” 이렇게 묻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니까 분노가 슬픔으로 변하는 안색이 분명했다. “네, 살아있는 아이들 셋이 있지요.” 그녀는 담담히 대답했다. “그리고 죽은 아이 한 명도요.”
나는 내가 어떤 문을 여는지도 모르면서 다음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9년 전 일이에요. 사내 아기를 낳았거든요. 어느 날 밤 아기를 제 침대에서 안고 잤는데 그만 자다가 아기를 눌러서 질식시켜 버렸어요. 내 아기를 내가 죽였다고요!” 분노는 곧 히스테리로 변했다. 흐느끼고, 울부짖다가 다시 한동안 흐느꼈다. “내 아기를 내가 죽였다고요!…”라며 새된 비명을 연신 질러댔다.
울부짖는 그녀 곁에 앉아 손을 잡은 채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문득 내 안에서 연민이 북받쳐 올라 나도 울기 시작했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이 어떤 것일까 생각해봤다. 네 명의 내 자식을 위해 늘 하던 기도가 떠올랐다. “오, 주님. 제 아이가 죽는 걸 제 눈으로 보는 일이 없도록 해주세요. 저를 먼저 데려가 주세요!” 아이를 죽게 한 일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처절한 감정은 나로서는 깊이조차 잴 수 없는 커다란 아픔이다. 그뿐 아니다. 9년 동안 속죄를 꿈꾸지 못하고 죄의식과 부끄러움, 공포를 품고 살아야 한다는 건 커다란 형벌이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문과도 같은 시간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녀가 울부짖는 5분은 마치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진정하고 마음을 조금 추슬렀을 때 나는 이렇게 물었다. “예수님이 어머니를 용서해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아세요? 우리의 죄를 위해 그분이 값을 치르셨잖아요. 그러니 우리가 그분을 신뢰하고 용서를 구하면 죄의식과 치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함께하실래요?”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함께 기도했고, 예수님이 주시는 용서를 경험했다. 호랑이 아줌마는 예수의 보혈로 치유와 자유를 경험한 새로운 여인이 되어 진료실 밖을 나섰다.
나는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한 사람에게 다가가 마음을 어루만져 기적을 일으키시는 걸 목격했다. 은총이었다. 그 일을 겪은 뒤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누군가 다른 사람이 전에 이 여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면, 그녀의 분노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내심을 품었다면 ‘질병’의 진짜 뿌리를 진작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도 예수님이 죄인들의 친구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지 않았다면, 그리고 호랑이 아줌마나 나 자신,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을 치유할 진짜 희망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았다면, 그 질병의 뿌리에 끝내 닿지 못했을 거다.
(사진 제공: 저자)
환자들은 그냥 ‘닥터 밥’이라고 부른다. 2001년에 코이노니아 가정 의원을 설립했다. 알버니 의대와 함께 ‘처음부터 돌봄(Care from the Start)’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이를 통해 의대 학생들에게 빈곤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생생하게 경험시켜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