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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ckout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은 기독교의 희망과 인간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한다. 쟁기출판의 피터 맘슨 편집장은 듀크 신학교의 스탠리 하우어워스 명예교수와 신앙인들의 대처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화상으로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쟁기: 올해 부활절에는 수세기 만에 처음으로 전 세계 대부분의 교회가 문을 닫았습니다. 문을 닫은 교회란 무얼 의미할까요? 사회적으로 거리를 두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을까요?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회 문이 닫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 아내 폴라와 저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채플힐에 있는 성공회 교회인 '성가족의 교회'에서 영성체를 받는데요. 이번 부활절 예배는 온라인으로 참여했습니다. 이후에 우리는 사우스다코타 주 수 폴즈 시에서 드리는 예배에 "갔답니다". 수스 폴즈의 주교께서 다른 한 분과 미사를 집전하는 걸 보면, 기독인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어도 기독인을 하나로 묶는 그 단순한 행위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번 부활절에 하나님의 제단은 비어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그렇지 않다고 확언합니다. 그 부분을 제가 말씀 드리고 싶군요.
이런 상황이 오랫동안 계속된다고 상상해 볼까요. 지금 제가 선생님과 이렇게 화상으로 통화하듯이 소셜 미디어가 직접 마주하는 동료애를 대체한다면 무엇을 잃는다고 보십니까? 그건 제가 사는 브루더호프 공동체에서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저희도 직접 만나지 못하고 있거든요.
현재 상황의 역설적인 점 중 하나는 바이러스의 위협을 통해 우리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발견했다는 겁니다. 공교롭게도 바이러스 대처 방안이라는 것이 일종의 외로움을 상징하는 사회적 몸짓(거리두기)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서로 2미터 이내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보통 우리 몸은 함께하는 수단입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서로를 만지잖아요. 이제 그걸 못한다는 거죠.
제 생각에 그 외로움은 현대성에 깊이 내재된 무언가 과장된 형태입니다. 심지어 바이러스 유포 이전에 우리의 일상적 행동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필요가 없는, 즉 우리 자신의 삶은 홀로 꾸려나갈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일종의 외로움이죠. 바이러스 사태 이전에도 우리는 보통 사람들의 일부분이 되는 것을 꺼렸습니다.
물론 기독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한 인간을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가 보통 사람들의 일부가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인들에게는 소명 받은 바와 전염병 대처 방안 사이에 긴장감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으로선 서로를 위한 최대의 섬김은 분리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참 역설적이지요.
인내라는 도전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곁에 지인 하나 없이 혼자 죽어가고 있는 고통스러운 상황입니다.
저는 “고통의 존재(Suffering Presence)”라는 책에서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이들의 첫 번째 도덕적 의무는 치료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곁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낫게 하기 위해 많은 것을 할 수는 없지만 당신이 혼자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거였죠.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지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저 스스로 매우 깊은 다짐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사람들이 혼자 죽도록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그동안 인내의 미덕에 관해 많이 쓰셨는데요. 어떤 면에서 우리 모두는 지금 작게나마 인내심을 배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평화로운 왕국(The Peaceable Kingdom)”이라는 책에서 저는 희망과 인내가 기독교 미덕의 핵심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때마다 희망을 품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 종말론적인 사람들이지만, 우리의 희망이 인내로 교육받지 못한다면 폭압적으로 되지요. 희망과 인내는 필연적으로 상관된 덕목입니다.
메노나이트 역사학자인 알렌 크라이더의 “초기 교회의 끈기 있는 발효(The Patient Ferment of the Early Church)”라는 책을 읽고 저는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의 저서를 참고했는지 모르겠는데요. 크라이더는 초기 교회의 선교에서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 부분이었는지 기술합니다. 복음 전도나 봉사 프로그램 운영이 아니라 인내심으로 그들의 희망을 살아냈다고요. 복음 전도와 봉사는 지금 당장 하기 어렵지요. 이웃 사랑이 참 요구되는 때인데 집에 머물러야 됩니다.
맞습니다. 인내는 진보를 향한 우리 헌신 탓에 현대가 잃어버린 매우 까다로운 미덕이지요. 우리는 조급함에 기반한 사회질서를 가지고 있거든요.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회를 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세속적인 권력에 지나치게 복종한다, 소명에 충실치 못하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런 일이 앞으로 종교의 자유나 교회의 지위에 어떤 영향을 줄거라 우려하십니까? 이게 좋지 않은 선례가 될까요?
글쎄요. 이런 상황에서 자칫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그런 질문에 대해 답을 안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 폐쇄가 비극적이지만 꼭 필요하고, 이웃 사랑의 몸짓이자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인들과 비기독인들 모두에게요. 우리는 모두가 공통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런 필요를 공통의 생활방식으로 대처하고 있지요. 우리가 함께 만나지 못하는 어려움을 비기독인들과 나눠야 합니다. 물론 기독인으로서 그런 짐을 지는 것이 별반 다를 게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겁니다.
잘 살기, 잘 죽기
이 전염병은 확실히 어떤 면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전염병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이 전염병을 문자 그대로 종말론적인 의미로 보고, 교회와 세계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는 것으로 봐야 할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발견에 주목해야 할까요?
사람들은 "상황이 전과 결코 같아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정상(正常)"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가 ‘오래된 정상’이라도 제대로 발견한 적이라도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상이라는 말은 상당한 오해의 소지를 일으키거든요. 진정한 '새로운 정상'은 부활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는 무덤에서 부활하셨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이천 년 동안 그 변화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믿음에 충실하게 살고자 했습니다.
기독인들이 죽음을 경솔하게 대할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아니요. 죽음을 경솔하게 대해서는 안 되지만, 죽음이 패배했다는 것을 이해하면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미국은 깊이 죽음을 부정하는 사회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부정하지 않고, 죽음에 대한 기술적인 해결책에 기대지 않는 사람들이 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미국인들은 의학이 충분히 진보하면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을 운명인 사람들입니다. 그 운명이 어떻게 우리를 공통의 삶 안에 하나로 결속하느냐, 그것이 우리가 직면해야 할 도전입니다. 죽음에 패배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진실은 사람들에게 각자 다른 방식으로 다가갔을 겁니다. 그걸 저는 뉴욕의 하트섬 뉴스를 사진으로 봤습니다. 뉴욕의 병원에서 죽은 사람들이 가족을 못 찾거나 매장할 형편이 안 되어 긴 참호 형태로 구덩이를 파내고, 구덩이 속에 쌓인 관들을 라이커스 섬 죄수들이 매장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저는 이 대유행병을 통해 우리가 어떤 식으로 정책 결정을 내려왔는지 많은 걸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도 의사 표명을 하지 않았다는 걸 우리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던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노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양로원으로 밀어 넣고 있죠. 저는 이번 여름에 여든 살이 됩니다. 우리 사회가 노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라곤, "우리를 내버려 두세요.”입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기술적으로 진보된 문명 속에 살면서 능률성에 전념하느라 오래된 지혜의 전통을 놓쳤다는 뜻입니다. 노인들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할 말을 하며 우리를 돕도록 책임을 부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노인들이 할 일이라곤 어린시절로 되돌아가는 거라며 우리의 삶을 향상시킬 책임감과 지혜를 박탈합니다. 만약 백 년 안에 기독인들이 자신의 아이나 노인을 죽이지 않는 사람들로 판명난다면 우리는 잘 했다는 소릴 듣게 될 겁니다. 연민이라는 이름으로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잘 살기 위해서는 살만한 인생에 대한 통찰력을 지닌 지혜로운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전통 공예 식으로 집을 짓는다고 치면. 골치 아픈 문제에 부딪칠 때 대처 방법을 절로 아는 이들이 있습니다. 해답을 책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보고 배운 거지요. 현명하게 사는 다른 사람들을 보고 배우며 그런 사람이 되도록 우리 자신을 알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필요합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의료 윤리에 대해서, 특히 치료 받을 사람을 우선순위로 분류하는 문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 감염이 가장 컸던 지역의 의료 당국은 특정 연령 이상이나 장애인에게 인공호흡기나 ICU 치료를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그 문제는 어떤 기준으로 결정을 구체화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탈리아 당국의 의료 개입은 단기간 동안 생존을 유지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근거에 따라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합리적인 판단 기준이지만 매우 고통스러운 결정이지요. 의사는 그들의 첫 번째 임무가 환자를 살려두는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이 항상 가능한 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의 임무는 환자가 잘 죽도록 돕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상당한 요구입니다. 보통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그런 특별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간호사들이죠.
기독인으로서 죽는 방법이 따로 있을까요?
우리의 죽음은 우리 삶의 확장입니다. 이 말은 기독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믿기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면서 하나님을 신뢰했던 것처럼 죽음을 통해서도 그분을 신뢰합니다.
권력과 탈자유주의
이 대유행병이 증명한 거 하나는 개인이 지닌 자율성의 한계입니다. 우리 모두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고 그래서 연대가 절실합니다. 선생님은 자유주의, 특히 자유주의적 개인주의 비평가로 알려져 있는데요. 코로나바이러스 주제와는 전혀 별개로 탈자유주의는 현재 기독교를 포함한 각계에서 점점 더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상가로 우파 진영의 패트릭 드닌과 로드 드레허, 좌파 진영의 판카지 미슈라와 낸시 프레이저를 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타당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탈자유주의적 순간”이라고 불리는 것의 가치는 무엇이며, 위험은 무엇일까요?
저는 국가에 대한 이론이 없습니다. 탈자유주의자들은 우파든 좌파든 모두 국가에 대한 이론을 원합니다. 저는 정치 세계를 제 자신이 협상해야 할 현실이라고 생각하며 그저 수용합니다. 드닌과 드레허가 제 말을 인용하는 걸 찾기 힘들 겁니다! 하지만 저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자유주의 비판은 단지 정치 이론일 뿐만 아니라, 비정상적일 정도로 결함이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자유주의가 지난 2세기 동안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무엇이 가치있는 삶을 만드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을 양성해 온 것을 아주 관심있게 봤습니다.
지역주의와 공동체주의 같은 가치를 지향하는 탈자유주의자들과 정치에 집중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분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논의에서 국가가 진정한 행동을 할 거라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국가 권력을 휘두른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피를 끓게 만들죠. 기독인들도 여기에 빠져듭니다. 기독인으로서의 우리의 소명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보다 정치 캠페인이나 정책 해법에 흥분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저도 정말 그렇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내심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보는 거죠. 정치는 종종 빠른 해결책을 찾습니다만 항상 빠른 해결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끈기 있게 서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공동의 선을 발견하는 걸 가능케 하지요. 그런 면에서 볼 때 말씀하신 지역주의 같은 것이 가톨릭 사회 회칙에서 강조되었지요. 저는 상당히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정이 가장 지역적인 사회집단이지요. 이 사회 회칙들은 가족이 도덕적이고 건설적인 방법으로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이해합니다. 이것이 정치의 핵심입니다.
특히 주목을 받고 있는 탈자유주의 학파가 있습니다. 하버드의 아드리안 버뮬(Adrian Vermeule)이나 뉴욕 포스트의 소랍 아마리(Sohrab Ahmari) 같은 사람들로 대표되는 가톨릭 통합주의(Catholic integralism; 영적 권력이 세속적 권력에 우위를 점해야 한다고 믿음.-옮긴이 주)입니다. 아나뱁티스트 잡지로서 저희는 결연코 신성로마제국을 회복한다거나 기독교를 진흥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한다는 주장에 공감할 수 없는데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공의 정의에 대한 질문에 대해 분명한 도덕적 기반을 바라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선생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물론 브루더호프는 종파주의자(sectarian)로 불립니다. 그런데 정말 종파주의자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다면 가톨릭 통합주의를 보세요. 구체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브루더호프는 어떤 면에서 통합적인 공동체입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찾고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공동체입니다.
저는 이 사람들 중 몇몇에게 "나도 통합주의자야."라고 놀리곤 합니다. 저는 아무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아나뱁티스트 통합주의를 신뢰합니다.
정말 옳은 말씀입니다. 사람들 반응은 어땠습니까?
어리둥절해 하더군요. 대화에서 종종 고개를 끄덕이며 산상수훈과 예수님의 방식에는 근원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양립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하지만,"이라고 하며 다양한 이유로 왜 치명적인 무력 사용을 옹호하는지 이야기를 되돌립니다. 마치 예수님을 옭매이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말이죠.
권력은 극도로 유혹적입니다. 물론 권력은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권력이냐를 물어야 됩니다.
한 유명한 신약성서 학자는 디트리히 본회퍼에 대해 생각할 때, 도저히 도약하기가 어렵다고 제게 말하더군요.
음, 저는 그 도약이 어떤 모습인지 더 잘 이해하고 싶은데요. 정당한 전쟁(Just War) 옹호자가 되고 싶다, 좋아요! 그렇다면 본인의 기준에 일관성을 유지하라고 하세요. 정당한 전쟁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전쟁은 끔찍한 일이지만, 때로는 전쟁을 해야 할 때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전쟁이 정의의 기준에 아마도 6 중에 4만 충족시켜도 전쟁을 일으킬 충분한 기회를 줄 겁니다. 그런 식으로 전쟁을 사고한다면 그들이 정말 제대로 심각하게 사고하고 있는지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부분적으로만 옳다면 그건 정당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만약 전쟁이 바로 정당하지 않다면, 그게 뭡니까? 왜 우리는 세계 대전을 1차 세계 도살, 2차 세계 도살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뭔가를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당화된 담론입니다.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평소에는 금지시킨 일들을 하도록 허용합니다. 그렇게 결정을 숨기는 거죠. 사실, 저는 우리 미대통령이 대유행병에 대한 투쟁을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이 걱정됩니다. 그건 제가 볼 때 굉장히 위험한 정당화 담론입니다.
정의에 대해 말하자면, 이 대유행은 경제적 불의에 대한 의문을 부각시켰습니다. 부는 누가 살고 누가 죽느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사실은 결정을 하지요. 만약 선생님이 카리브해에서 요트를 띄운 억만장자 데이비드 게펜이라면 무사하겠지요. 하지만 저희 지역의 공공 요양원의 일원이라면 그렇지 못할 겁니다. 그들은 매일 죽어가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이 살인적 불의 한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런 일이 죽 벌어지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부 사회구성원에게 정당화될 수 없는 방식으로 살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걸 인정한 이상, 우리는 행위와 삶으로 이 사실에 대응해야 합니다.
들리는 말로는 저를 복음주의 진영의 좌파라고 합디다. 저는 복음주의자도 아니고, 좌파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요. 저는 그저 이 유별나게 이상한 세계에서 기독인들이 최선을 다해 충실히 협상할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려고 애쓸 뿐입니다.
본 인터뷰는 2020년 4월 16일 영상 통화로 진행되었으며, 지면 분량에 맞추되 명확성을 위해 편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