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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ckout한때 월스트리트 은행가였던 크리스 아나디는 3년 간 미국을 횡단하면서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방문했다. 브롱스로부터 오자크를 거쳐 LA 동부까지 여행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만든 매력적이고 따끈따끈한 사진 에세이집 “품위(Dignity)”에서 자신이 배웠던 것을 공유했다. 계간 쟁기의 피터 맘슨이 크리스와 함께 패스트푸드점, 점포 교회, 능력주의 그리고 걸인에게 현금을 줘도 되는지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쟁기: 엄청난 시간이 소모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크리스 아나디: 이 일은 2012년에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일명 잘 나가는 월스트리트 은행의 증권 거래인이었습니다. 20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해온 끝에 이제는 세상이 어떤 지를 더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내서 뉴욕시를 걷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속해 있던 사회 집단 사람들이 가지 말라고 했던 곳에 다다르게 되었지요.
그중 하나가 헌츠 포인트였는데, 이곳은 마약과 매춘의 중심지로 유명했던 사우스 브롱스 지역입니다. 그곳에서 3년이란 시간을 보냈죠. 노숙자들, 성매매 노동자들, 마약 중독자들과 아주 친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겁니다.
2015년, 저는 무시 당하거나 평판이 안 좋은 미국의 다른 지역으로까지 나아가 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메인주의 루이스턴이나 캘리포니아주의 베이커스필드, 텍사스 주의 엘 파소와 같은 곳들 말이지요.
그때 주행한 거리가 24만 킬로미터가 넘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 일을 지속할 수 있었던 동기는 무엇인가요?
첫 번째 동기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격정이랄까요. 헌츠 포인트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는 시작부터 불리한 것 투성입니다. 마치 법적, 경제적, 문화적 시스템이 전부 이 아이들에게 불리하게 작동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잘 사는 동네(Upper East side, 뉴욕 맨해튼을 말함 - 역주)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부지런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요. 그러나 20년 간 뉴욕에서 안락한 삶을 살았고,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제가 보기에 이 동네는 끔찍한 가난과 불의가 넘쳐났습니다. 저는 다른 곳에서도 사정이 똑같은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두 번째 동기는 개인적인 차원이었는데요. 첫 번째 해였던가 두 번째 해였던가, 이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있었을 때 제가 월스트리트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주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주말이나 저녁이 되면 저는 카메라를 챙겨 거칠기로 유명한 이웃들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곤 했습니다. 급기야 저는 직장을 그만 두었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죠. 이유는 그때도, 지금도 이 일이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아주 이기적이죠? 하지만 저는 월 스트리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헌츠 포인트 사람들과 있을 때 더 편안했습니다.
무너져 가고 있는 미주리 도심을 방문하셨을 때 지역 주민들이 “크리스탈 메스(crystal meth, 필로폰 마약류)에 대해 쓰려고 왔구먼.” 하고 인사를 건넸다면서요? 어떻게 가난한 동네를 다룬 책이 ‘구경꾼’의 한계를 극복했을까요?
사람들은 이걸 ‘빈곤 포르노’(가난에 대한 연민을 이용하는 매체-역주)라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우리는 빈곤 포르노가 조금 더 필요해. 호화 포르노는 충분하거든”이라고 대꾸합니다.
물론 이런 지역 사람들에 대해 글을 쓰는 잘못된 방식이 존재한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방법과 의도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종종 그런 지역에 갈 때 사전에 어떤 정보도 읽지 않고 접근하곤 합니다. 선입견을 갖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켄터키주 프레스톤스버그라는 곳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 지역 한복판에는 맥도날드와 월마트가 입주해 있는 쇼핑센터가 있었습니다. 매일 거길 갔는데, 야외 피크닉용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한 신사를 보았습니다. 그는 한 상점에서 야근 교대근무로 일을 했더랬죠. 대화를 시도했지만 매번 손사래를 치는 거에요. 그 후로 12일이 지났을 때, 드디어 응답이 왔습니다. “그래. 어디 사진빨 잘 나오게 한번 찍어 보쇼.” 우리는 서로 담소를 나누었고, 그가 몇 가지 명대사를 날려서 함께 웃었습니다. 대화가 끝날 무렵 이런 얘길 하더군요. “프레스톤스버그가 얼마나 마약과 중독자 천지인지 그런 얘기만 쓰지 말고, 얼마나 우리가 좋은 사람들인지 좀 써 봐.”
이것이 제가 이 책을 쓰고자 했던 동기입니다. 제가 방문했던 지역마다 사는 건 달라도 품위에 대한 동일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지요.
여행 도중에 800개의 맥도날드 식당을 방문하셨는데요. 왜 그러셨죠?
예전에 증권거래인으로 잘 나갈 때는 맥도날드를 절대로 발을 들여놓지 못할 민망스러운 데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헌츠 포인트를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늘 맥도날드에서 식사를 하게 되는 거에요. 맥도날드는 그 지역에서 드물게 제대로 작동하는 몇 안 되는 공공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헤로인에 중독된 노숙자들과도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대부분 맥도날드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씻기 위해 그곳을 찾아가죠. 그곳은 핸드폰을 충전할 수 있는 곳이구요. 그리고 한 시간 동안 조용히 앉아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쉬면서 더위나 추위를 피할 수 있고 값싼 음식도 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윤리적으로 그 음식들을 존중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저렴하고 맛도 좋습니다. 돈이 많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맥도날드야말로 실제적인 지역 정서가 살아 있는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알게 된 것은 맥도날드가 사실상 지역의 중심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도심 지역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 없는 문제투성인데다가, 정부 서비스는 실패했습니다. 비영리 기관들이나 민간 부문들이 돕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반면, 맥도날드는 여전히 몇 안 되는 열린 장소 중 하나이고,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화장실을 가지고 있으며, 조명이 켜져 있는 곳입니다.
결국 저는 일명 ‘맥도날드 테스트’를 구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제 책의 넓은 주제는 우리 사회가 사람들을 앞줄과 뒷줄, 그러니까 내가 한때 속해 있던 재정적으로 안정되고 좋은 학군에 공공 서비스가 갖추어진 특권층과 그 외 모든 사람들로 구별한다는 겁니다. 이 테스트는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맥도날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경험상, 그들의 대답은 대체로 그 사람이 앞줄에 속했는지, 뒷줄에 속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반(反) 맥도날드 정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나친 경쟁과 물질주의적인 세계에서 다국적 기업들이 어떤 일을 저질러 왔던가요? 이러한 회사들의 관심이라곤 지역 사회에 파고 들어가 돈을 벌고 빠지는 것이죠. 물론 맥도날드도 이러한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맥도날드가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실제로 공동체 정서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친교 모임을 너무나 열망한 나머지 상거래 장소를 공동체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맥도날드는 사람이 들어오면 가능한 빨리 내보내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남성 노인층, 여성 노인층, 성경공부, 체스 게임 모임들이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도 방문하셨는데, 무신론자로서 어떻게 보셨나요?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분명 저는 무신론자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층 더 복잡하고 미묘해졌습니다. 처음엔 맥도날드에 가는 것과 같은 이유로 교회에 갔더랬습니다. 그 동안 저와 대화를 주고 받았던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이 교회였습니다. 저는 종교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교회든, 이슬람 사원이든 가리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가 그 지역의 정서를 반영합니다.
교회도 맥도날드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교회는 조명이 켜 있고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습니다. 대체로 교회는 점포들이 있는 곳에 자리잡았는데요. 판자로 덧댄, 버려진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를 가보세요. 그러면 영락없이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의 현관문은 닫혀 있지 않았습니다.
제 책에는 성공한 사례 이야기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삶의 양식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나마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은 신앙을 통해, 즉 교회를 통해 그 일을 해낸 이들이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마지못해 교회를 인정했지만, 나중에 교회가 하고 있는 일들을 보고 나서 완전히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만나셨던 많은 사람들은 전통적인 신앙을 지키면서도 흔하지 않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성전환 성매매자들 같은 사람들도 여전히 성경을 삶의 중심에 두고 있더라고요.
크랙 하우스(코카인을 판매하는 밀매소-역주)에 가보면 성경이나 쿠란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갖가지 미친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그들은 종교적입니다. 구제 사역도 그 일부인데 종교적 공동체는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놀라운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도 성서 내에서, 교회 안에서, 그들을 받아주는 공동체를 찾고 있습니다. 그들을 판단하려는 긴장감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들 대다수 교회들은 많은 것을 묻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는 당신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저는 또한 그들이 성서에서 실패의 수용을 배운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인식과 우리는 모두 타락했으며 실제로 모든 것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말입니다. 그곳에는 우리보다 더 위대한 것이 존재합니다. 만일 당신이 크랙하우스에 살고 있고, 본능적으로 이 세계의 거대한 불의를 본다면, 이것만이 세상의 전부인양 여기는 건 전혀 호소력이 없습니다.
부유층 출신이고, 교육을 받았으며,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저와 같은 사람들은 신앙의 증거로부터 뒷걸음치며 달아나려고 했습니다. 오히려 길거리에 살면서 죽음의 운명과 실패와 비천함을 이해하게 된다면, 훨씬 더 쉽게 성경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행이 어떻게 성공과 능력주의에 관한 관점을 변화 시켰나요?
우리는 교육을 잣대로 서로를 분류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교육에서 실패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상류층조차도 학교에서 공부를 잘 못하는 사람들을 놀림감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육에 따른 보상 시스템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스마트함을 협소하게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대단히 물질주의적이며 대학 학위 같은 증명서를 우상화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공은 돈을 얼마나 버는지, 얼마나 많은 증명서를 땄는지로 정의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공을 정의하는 것이 지닌 문제는, 비록 얼마나 많은 교육을 받았고 돈을 버는지를 측정하는 것은 쉬울지는 몰라도 훌륭한 부모 됨의 가치, 고향을 등지지 않고 평생 기여하기로 정한 결심의 가치를 놓치는 단점이 있습니다. 능력주의 사고방식으로는 우리가 점수를 매길 수 없는 것을 만나게 되면 그 가치를 아예 깎아내리는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성공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멕시코계 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동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때 글을 쓰기 위해 맥도날드에 가곤 했습니다. 그때 매일 밤 그곳을 찾아오는 한 젊은 여성을 알게 됐어요. 한번은 제가 물었습니다. “왜 여길 매일 밤 오죠?”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와이파이가 필요해서요. 우리 집 형편으로는 지불을 못하거든요.” 그녀는 근처 전문대학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뉴욕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자신도 거기서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좋은 학교에 연락해 보라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그럴 능력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여섯 식구의 장녀였고, 가족들의 통역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던 거지요.
일반적인 성공의 기준에 따르면, 그녀는 기회를 걷어 차버린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말일까요? 가족을 위해 그곳에 머물러 있기를 결정했는데 말이죠.
네바다주 리노에서 아프리카계 십 대 미국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전에 다른 주에 있는 대학에 다닐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고 그 대신 지역의 전문대학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결정한 중요한 이유는 어머니가 12년 동안 빠져 있던 알콜 중독에서 벗어나 금주를 하고 있었고, 어머니를 위해 그 곁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 사람이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10년 전에 이런 말을 들었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는 독립된 인간이 되고 싶어합니다. 장소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하면서요.
어떤 것이 배우기 가장 힘들었나요?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헌츠 포인트에 살고 있던 마약거래업자들과 성매매 노동자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2년이 지나면서 제가 돕고 있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의 현실이 어떤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지식인 엘리트의 현실은 노동자 계급의 현실과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무엇을 생각하느냐, 무엇을 먹고 사느냐, 어디로 쇼핑하러 가느냐, 누구와 교류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것을 제거하면, 그러한 요소를 분리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당신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데 실패할 것입니다. 지식인 엘리트는 노동자 계급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양방향의 문제이지만, 먼저 그러한 현실로부터 돌아서는 사람들은 교육받은 엘리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월마트를 예를 들어 봅시다. 월마트를 좋아하지 않는 많은 이유들이 존재하지만, 한 도시의 이주민 공동체를 알고 싶다면 월마트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많은 중산층 사람들이 월마트에서 쇼핑을 하지만 그들은 보통 새벽 2시에 가지 않습니다. 사실 그 시간이 월마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간대입니다. 많은 월마트들은 사람들에게 밤샘 주차를 허용하고 있기에 집 없는 사람들이 월마트 쇼핑센터에서 차를 세워 두고 잠을 자고, 아침에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형 마트들이 우리 사회의 투명인간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 중 하나임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앞줄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지식인들은 그러한 세세한 삶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뒷줄에 사는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가족, 장소, 신앙이지 경력이나 증명서가 아닙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러한 간극이 갈수록 더 커져서 두 개의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계층의 언어를 통역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민 문제는 대부분 서구 국가에서 정치 구호가 되고 있습니다. 이민에 대한 비판자들은 이민이 문화적 정체성을 흐리고, 공동체 특히 노동자 계급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하고 있 는데요. 그런 사례를 보신 적이 있나요?
그런 말은 정말 가장 잘못된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종 이러한 도시에서 유일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은 이민 정책입니다. 메인주 루이스턴은 1998년까지 백인 기독교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소말리아 이민자들이 정착한 이후로 지금은 15%의 흑인 무슬림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도심지에 정착했고, 그 도시의 일부를 활기가 넘치는 곳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동안 뉴욕에서 수십 년을 지낸 남부 출신인 저로서는 작은 남부 도시를 방문해 번성하는 멕시코계 미국인 공동체를 알아가는 일이 종종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텅 빈 지역에서 가족 소유 식당과 사업체를 운영하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이러한 도시의 빠른 변화가 많은 노인들에게는 두려운 요인이 되곤 한다는 것입니다. 200년 동안 강력한 지역 정체성 정서를 간직하고 있던 공동체들이 갑작스레 외면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많은 공동체들은 수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민자들은 쉽사리 희생양이 됩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 보죠. 루이스턴에서 저는 백인 노동자이자 베트남 전쟁 참전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지난 30년 간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면서 8구역 임대주택에 살았습니다. 마약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매주 무료 급식소에 가면 줄을 서야 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앞에 있던 사람들 절반이 소말리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요. 그가 했던 말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말들이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 그가 이런 심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 이민은 쉬운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인정하긴 싫겠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한가지가 인종차별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미국에는 끔찍한 인종차별이 존재합니다. 이는 부인할 수도 없으며 줄어들지도 않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발전된 도시가 종종 가장 인종차별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망각합니다. 백인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발생하는 추한 인종차별 사건에 초점을 맞추면서 구조적으로 덜 드러나는 엘리트 계층의 인종차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지역 구획법의 문제로, 가장 좋은 학교들이 있는 곳이 어디며, 체포되거나 구속될 가능성이 어디가 높으며, 좋은 직업을 구하기 용이한 곳이 어딘지를 나누는 것입니다.
진보적 정치로 유명한 밀워키를 방문해 보니 역사적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도시의 좁은 지역에만 살도록 제한되어 왔고, 지금도 대체로 그곳에 밀집되어 있습니다. 대다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1940년대와 50년대에 미시시피 같은 곳에서 온 이주민들입니다. 저는 이 공동체의 오랜 구성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분열된 남부에서 성장한 후 북부로 이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듭 말했습니다. “인종차별이 과거보다 나아진 것이 전혀 없소.” 밀워키는 이미 1세기 전에 미국 의회에 사회주의자들을 선출했던 곳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제게 말했습니다. “보시오, 여기 인종차별은 다르다오. 남부에서 인종차별은 노골적이었지요. 여기 인종차별은 당신 등 뒤에 있소.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지만 실제로 행동하지는 않는다고.” 이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저임금 직업에 갇혀 있고, 빈민 지역에 갇혀 있으며, 젊은 사람들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높은 장벽이 앞에 서 있습니다.
책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부분 중 하나는 흑인 시민권 운동에서 가장 유명한 앨라배마주 셀마를 서술한 것인데요. 아름답게 간직되어 왔던 역사적 기념비인 1964년 셀마 행진이 어떻게 실패한 주택 계획 탓에 잊혀지는지를 쓰셨습니다.
저는 셀마를 사랑합니다. 그곳 사람들은 저를 매우 따뜻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셀마에도 멋진 지역이 있기는 하지만 그 지역은 작고 제한적입니다. 그곳의 대다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권리가 박탈된 상태로 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는 셀마처럼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무기를 소지하고 다니거나 마약을 공개적으로 또는 태연하게 거래하는 것을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셀마 사람들에게는 분노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정당한 분노 말입니다. 사람들은 정치 활동으로 무언가를 개선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은근한 신랄함과 냉소를 품고 있습니다. 물론, 앨라배마주는 흑인들이 투표하는 걸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흑인들이 투표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찾아서 한 거지요. 오늘날 셀마의 현실은 1960년대 시민권 승리가 주로 상징적이었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이 행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하면서 사람들을 돕기를 원했지만, 나중에는 그들을 이해하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하셨는데요. 부정적 삶의 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들의 품위를 지켜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보통 사람으로 대해 주는 것 말입니다. 누군가 깨끗한 음식이 필요하다면 깨끗한 음식을 제공하십시오. 누군가 병원에 가야 한다면 그들을 데리고 가십시오.
저는 종종 사람들에게 질문을 받습니다. “음, 내 주변에 노숙자가 있어요. 무슨 일을 해야 할까요?” 그냥 보통 사람처럼 대해 주세요. 앉아서 이야기를 하세요. 순수하게 그들을 초대해 커피 한잔을 대접하세요. 공통 관심사가 생긴다면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억지로 친한 척하지 마시고요.
제가 배운 실천 행동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을 안아주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이 얼마나 더러운지 신경쓰지 않습니다. 2~3개월 동안 목욕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안아 준 적이 있습니다. 이런 행동이 그들을 보통 사람으로 기꺼이 대하고 있다는 증표입니다. 모든 사람을 품위를 가지고 대하십시오. 특히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구걸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는 일도 포함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저는 항상 지갑에 5달러짜리 지폐를 갖고 다닙니다. 구걸하는 사람들은 종종 웃기다는 듯이 저를 쳐다봅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갑에서 5달러짜리로만 된 천 달러 뭉치를 꺼내 들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마약은 9달러입니다. 마약을 사기에는 부족한 돈이죠.
누군가에게 5달러를 건네줬는데 4달러를 더 달라고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무 뻔하죠?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맥도날드로 가서 식사 한끼 하자고 제안합니다.
당신 책을 읽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물질보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보길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푹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우리 삶이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더 좋은 기회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헌츠 포인트에서 한 마약 중독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밀리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는데 이제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실종되었을 때 몇 주 동안 찾아 헤맨 적이 있어서 잘 아는데요, 뉴욕시에서 서류나 신분증이 없이 죽으면 보통 하트 아일랜드(Hart Island)로 보내집니다.
그곳에는 수백만의 시신들이 매장되어 있습니다. 누군가는 합판 상자에 누여서 구덩이에 던져지고 라이커스섬 감옥 수용자들에 의해 매장될 것입니다. 무덤을 방문하는 일은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습니다.
밀리가 죽었다는 사실과 그녀가 매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런 금언이 떠올랐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중단할 때에라야 비로소 당신은 죽은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하트 아일랜드에서 합판 상자에 안치된 채 매장되고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당신은 훨씬 더 일찍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당신에 대한 추억은 이내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결국 무덤에서 밀리의 시신을 발굴해서 제대로 매장하도록 도와주면서 이런 생각을 계속했습니다. “무신론자로서 나는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사람이 어디에 묻히든 무슨 상관인가? 이미 죽었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러한 상징적인 행동은 밀리의 노숙자 가족들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찾아가 볼 수 있는 기념비와 묘비가 있으니 그녀에 대한 기억은 조금 더 오래 남아 있을 것입니다.
가난을 숭상하지는 맙시다. 하지만 사람들이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하는 이웃 동네에 조금 더 다가가려고 노력합시다. 거기 사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존경심을 다해서 말입니다.
인터뷰 진행 피터 맘슨, 2019년 4월 30일.
크리스 아나디는 플로리다에서 성장해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월스트리트 은행에서 재직하다가 프리랜서 작가이자 사진작가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뉴욕 타임즈, 디 애틀랜틱, 가디언, 파이낸셜 타임즈에 실렸다. 새 책 “품위: 미국 사회에서 뒷줄로 밀린 이들로부터 품위를 찾는다”는 2019년 6월에 Sentinel에서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