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입니다.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 요한일서 1:8-9
다른 모든 인간 존재와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죄를 지을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우리보다 하나님에게 더 가깝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이가 있다면 그건 아이들일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무조건 선하다는 생각으로 장밋빛 안경을 쓰고, 아이가 하는 일을 모두 ‘그저 아이이기 때문’이라며 넘어가는 것은 실수이다.
아이가 어떤 잘못을 저지를 때는 으레 어른들이 갖는 것 같은 의도로 하는 건 아님을 기억하자. 그러나 아이는 절대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이도 죄를 지을 수 있으므로 아이가 잘못을 분별하고 계속 옳을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아이의 의지는 여전히 완전하게 자유롭다. 따라서 아이가 악의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고, 선을 위해 아이의 마음을 얻도록 하자.
아이들을 가혹하고 엄격하게 대하는 태도는 잘못이다. 그러나 자유방임 역시 잘못이다. 여전히 훈육이 필요하고, 심지어 벌도 필요하다. 그리고 훈육은 사랑과 신뢰 관계에 바탕을 둔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이를 그분에게 이끌기를 원하는 부모라면 진정한 사랑이 요구하는 성경의 “소금”을 찾을 것이다.
아무리 어린 나이더라도 아이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사과하는 법과 진정으로 미안하다고 느끼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겸손은 평생 배우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마음에 겸손을 심어주지 않는 부모는 나중에 아이가 자라면 겸손을 가르치기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게 될 거다. “아이가 어리면 문제도 작고, 아이가 자라면 문제도 커진다.”라는 말을 낡고 상투적이라며 무시하지 말자. 세 살 아이의 고집을 정복하는 부모는 아이가 십대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부모보다 훨씬 더 앞장서서 가고 있는 셈이다.
때때로 아이가 나쁜 행동을 저지르는 것은 사실은 관심을 더 달라고 외치는 호소이거나, 부모의 사랑이 부족할 때 아이가 보이는 반응일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섣부른 결론을 내리거나, 아이가 일부러 나쁜 짓을 했다고 단정하지는 마라. 이유는 이렇다. 아이는 자기가 만들어 놓은 세상의 중심이고, 자기 주위의 세계를 자신만의 관점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가 어떤 일을 열심히 자랑하는 것은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그 일에 쏙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자연스러운 자기중심적인 성향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물론, 아이는 자라면서 자기 자신의 세계보다 더 큰 것을 볼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
아이가 으스대거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때, 또는 거짓말을 하거나 물건을 훔칠 때 우리 어른은 쉽게 그 아이만을 비난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부모는 자기 자신을 살펴보고, 자기 안에 있는 그 무엇이 아이에게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는지 생각해 볼 것이다. 블룸하르트는 우리 자신에게 검을 들이대고, 마음속에 있는 죄, 즉 우리 탓에 자녀에게 나타날 수 있는 죄를 잘라내야 한다고 충고한다.
아이가 질투나 싸움을 자주 하면 자신과 다른 아이와의 차이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게 도와주자. 사실 아이는 놀랍게 긍휼을 베푸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아이의 이기적인 성향과의 싸움이 아니라, 아이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북돋는 일에 집중하자. 그러면 아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가지 큰 계명의 뜻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마태복음 22:37-39)
아이가 인생은 공정한 경쟁의 장(場)이 아니라는 사실, 다시 말해 인생은 “공평”하지 않음을 배우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런 사실을 어렸을 때 받아들이는 아이는 나중에 성인이 돼서 혹독한 경험을 하게 되면 잘 대처하게 된다. 그래도 여전히 아이의 성격이나 가족이나 반 안에서 아이가 차지하는 위치가 주는 영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아이가 형제자매 중에 나이가 제일 많은가? 아니면 막내인가? 그러나 편애하지는 말자. 그리고 관대함은 긴 연설이 아닌 모범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종종 뭔가를 창피해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아이는 반쪽의 진실만 말하며 피하려고 한다. 그리고 아이가 정말 자기가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치르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때는 완전히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아이가 거짓말을 하면 우선 사실을 밝힌 다음, 아이가 그것을 바라보고 바로잡을 수 있게 도우면 된다.
만약 아이가 거짓말을 한 것 같은 데 확실하지 않다면 아이에게 사실을 고백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게 좋다. 아이의 잘못을 “현장”에서 잡으려고 하거나, 있을 법한 모든 동기를 캐려고 하면 오히려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아이의 자신감을 약하게 하고, 신뢰를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저 당신이 그 상황에 대해 기쁘지 않다는 사실을 아이가 알게 하고, 아이 스스로 나중에 문제를 바로 잡고 싶어할 때를 대비해 문을 열어 두면 된다. 아이는 거의 언제나 그런 조치에 반응하고, 어떤 때는 양심에 찔려서 한밤중에 부모를 깨워 거짓말을 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진실이 드러나면 아이가 스스로 새 출발을 한 것에 갈채를 보내는 걸 잊지 말자.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처럼 용서하자.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마가복음 11:25)
사람들의 차이에 관한 아이다운 질문에는 단순하게 대답하되, 조롱과 불경, 비웃음에는 언제나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다른 사람에 대한 무례로 시작된 일은 재빨리 하나님에 대한 불경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아이가 다른 사람을 욕 하거나 놀릴 때,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몸의 특성을 흉내 낼 때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아이가 성적으로 외설적인 행동을 할 때 절대 눈을 감아주어서는 안 되지만, 아이를 거칠게 다루거나 도덕주의를 강요하면 오히려 회복할 수 없는 아주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아이는 때때로 성적인 호기심을 갖는 시기를 거친다. 그러나 그때 어른의 변태적 행태를 보는 눈으로 아이를 판단하는 잘못을 절대 저지르지 마라. 아이는 자기 몸과 성에 관해 질문하게 되어 있다. 그때는 당황하지 말고 진실하게 답해주면 된다. 물론, 아이가 묻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줄 필요는 없다.
만약 아이가 성(性)과 관련된 잘못을 저지르면 부모는 아이의 양심에 호소하고, 잘못된 것을 분별하고 옳은 것을 선택하도록 도와주는 게 좋다. 아이는 본능으로 자기가 한 일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거짓말할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문제를 너무 크게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자. 실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밝혀서 훈육하고, 일단 해결된 일은 잊고 앞으로 나가는 게 좋다. 너무 긴 질문과 심문은 성적인 호기심만 더 자극하고, 오히려 아이의 마음에 더 큰 짐을 지우기 쉽다.
선생님이셨던 나의 부모님은 잘못을 저지른 아이와 사춘기 청소년에게 딱지를 붙이는 것은 아주 옳지 못한 일이라고 늘 강조하셨다. 두 분은 아이의 성격과 장래의 발달에 관해 섣부른 결론을 내리지 말라고 경고하셨고, 새로운 관심거리를 발견할 수 있게 건설적으로 도우라고 충고하셨다.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정도로 다양한 자녀 교육법이 선전되는 오늘날, 부모가 신뢰할 수 있는 좋은 충고는 어떤 것일까? 많은 부모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벤자민 스포크(Benjamin Spock)는 “부모는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사실은 훨씬 많이 알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직감과 능력을 신뢰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면에서는 옳은 말이다. 부모의 구실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판단을 신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이나 교육법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그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이다. 겸손한 부모는 아이를 위한 최선의 대답을 찾을 때 언제나 먼저 기도로 그분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아이에게 “희망이 없다”며 포기하는 것은 부모가 사랑과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진정으로 아이를 사랑한다면 절대 절망하거나 두 팔을 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아이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낸 날이라도 아이와 함께하는 기쁨을 잊을 수는 없다. 그리고 구속(救贖)하고, 회복하시는 그리스도의 힘이 우리와 아이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