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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민기의 노래를 처음 들은 건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저녁에 라디오를 틀었는데 ‘백구’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어떤 아이에게는 긴 다리의 하얀 백구라는 개가 있었는데 해마다 귀여운 강아지는 낳았다. 어느날 개가 아파 동물병원에 갔다가 주사를 맞기 전에 그만 달아나 버렸다. 이곳 저곳 찾아 헤매이다 만난 어떤 아주머니가 하는 말씀이 백구가 길을 건너 가려다 그만 차에…. 그날 밤에 아이는 꿈을 꾸었는데 때이른 흰눈이 내려 뒷산에 소복소복 쌓이는 모습을 봤다.
왠지 그 노래가 좋았다. 우리집도 개를 길렀는데 아버지는 해피라는 이름을 붙여주셨다. 1층이 문방구, 2층이 살림집이었던 우리 집 앞에는 차들이 다녔는데 어느날 집에 와 보니까 해피가 차에 치어 그만…. 노래 ‘백구’의 아이처럼 나도 해피를 뒷동산에 묻어 주고 나무 가지로 표시를 해 놓고 두고두고 생각했다.

김민기의 첫번째 앨범, 1971. 사진제공: 학전
그 다음에 김민기의 노래를 들은 건 1987년 쯤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저녁 무렵 친구들과 함께 시내에 가서 돈까스를 사먹고 명동 성당 앞을 지나가는 데 많은 사람들이 성당 입구에 서 있었다. 그때는 군사독재 시절이라 민주화를 외치다가 경찰에 쫓기게 된 사람들이 한국 천주교의 본부격인 명동 성당으로 몸을 피하곤 했다 많은 이들이 성지로 여겼던 공간이기 때문에 경찰이 함부로 공권력을 사용하지 못했던 곳이다. 성당 입구에 서서 무언가를 외치던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긴장했던 사람들의 표정이 금새 편해졌다. 여전히 엄숙해 보이기는 했지만 왠지 자신감이 넘쳤다. 성당 입구에 줄을 맞추어 서 있던 경찰들은 무표정했지만 왠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길 가던 사람들 몇몇이 멈추더니 작은 소리로 노래를 함께 불렀다.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우리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그곳을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내 가슴은 뛰고 있었다. 김민기가 쓴 ‘아침 이슬’은 1970년 양희은이 처음 불러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1971년 김민기가 처음으로 낸 앨범에도 이 노래가 실렸다. 김민기는 훗날 ‘아침 이슬’이 일상에서 느낀 것을 노래로 표현한 것뿐이라고 했지만, 당시 종신집권을 선언한 정권이 휘두르는 폭력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이 노래는 현실에 깨어나 용기를 내어 행동할 용기를 주는 노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학교 앞 거리에서 민주화를 외쳤을 때, 억압받는 노동자들이 모였을 때, 그리고 아끼는 이를 억울하게 잃었을 때 모여 이 노래를 불렀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footnote
김민기의 노래는 사람과 사람을 통해 퍼져나갔지만 그를 무대에서 볼 수는 없었다. 1972년 금지곡 ‘꽃 피우는 아이’와 ‘우리 승리하리라’를 불렀다는 이유로 자신의 첫 음반을 모두 압수 당하고 경찰에 연행되었다. 1974년에는 카투사로 입대했다가 보안부대에 불려가 노래를 만들라는 명령에 협조하지 않아 그 벌로 최전방으로 보내졌다. 1977년에 제대해서는 봉제공장에 들어가 회계 일을 봤는데 13, 14살에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을 위해 새벽에 학교를 열어 직접 가르쳤다. 이듬해에는 처참한 노동 현실을 고발하는 노래굿 ‘공장의 불빛’ 테이프를 가명이 아닌 본명으로 제작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지만 곧 풀려났다. 그뒤로 김민기는 농촌으로 가서 농사를 짓고, 겨울철에는 광산과 김양식장에서 일했다.
1987년에는 민주화의 요구가 더욱 거세졌다. 1979년 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그러던 중 1월 서울대 박종철 학생이 고문으로 사망한 일이 벌어지더니 6월에는 연세대 이한열 학생이 경찰이 쏜 최류탄에 맞아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학생들은 거리에서 장례식을 치르기로 결심했고 운구행렬은 시청으로 향했다. 그러자 사무실과 직장들에서 일하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백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서울 시청앞 광장에 모이기 되었다. 학생들은 운동 가요를 불렀지만 시민들은 대부분을 그 노래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누가 김민기의 ‘아침 이슬’을 부르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던 노래가 시작되자 광장 가득 메운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훗날 김민기는 자신도 이한열 학생의 장례식이 열리던 광장에 있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아침 이슬’을 부르기 시작하자 그는 전율을 느꼈다. “많은 사람이 운구를 시작하면서 그 노래를 음울하게 부르는데… 그 순간에 그 노래는 그 사람들의 것이긴 하죠.” 그는 노래가 자신을 떠난 순간 이제는 자기의 노래가 아니라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1992년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춘천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는데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한 학교 신문사에서 밤늦게 토론하고 글을 썼다. 그때 썼던 글들은 주로 해고된 노동자에 관한 것들이었다. 시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뽑았는데도 왜 여전히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하고,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학보사 동료와 함께 시위하는 곳이나 노동자들이 모인 곳을 취재하기 위해 따라다녔다.
이듬해, 김민기가 돌아왔다! 금지곡 가수가 된 후 사라졌던 김민기가 어느날 갑자기 무려 네 장의 음반을 한꺼번에 내고 다시 나타났다. 그렇다고 무대에서 그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찌된 일인지 음반만 내 놓고 여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가 직접 부른 노래들을 들을 수 있는 드문 기회였기 때문에 가난한 학생의 처지에 감히 씨디 4개를 단번에 구입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쓰던 자취방에 가서 아버지가 대학 입학 선물로 사 주신 태광에로이카 씨디플레이어에 CD를 넣고 틀었다. 그리고 두 번째 CD를 넣었을 때에는 친구 하나가 끓여온 라면을 소리 나지 않게 먹으며 노래를 감상했다. 더러는 젓가락을 놓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앨범 녹음 중 사진 작가: 이충열
뒤에 나는 미국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아내를 만났고 얼마 안 있어 영국으로 이사를 했다. 아이들에게 한국의 언어와 문화, 역사를 전해 주고 싶어서 한국 노래를 함께 불렀다. 처음에는 동요만 부르다가 민요와 포크송도 함께 불렀고 큰 아이가 중학교에 올라 갔을 때는 김민기의 ‘아침 이슬’과 ‘상록수’를 소개했다. ‘상록수’는 김민기가 봉제 공장에서 일할 때 가난해서 따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던 이들의 합동결혼식에 축하 노래로 만들었다. 1998년에는 한국의 IMF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공익광고에 사용되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던 그 노래를 이제는 아빠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가슴 뭉클해하며 감상했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
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
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50년 전에 만든 노래가 시대와 시대를 거쳐 사람들에게 다시 호출을 받는 동안 김민기는 어떻게 지냈던 걸까? 그는 1991년 서울의 대학로에 학전이라는 소극장을 열어 가수들과 노래패들이 공연을 열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1994년부터는 <지하철 1호선>이라는 록 뮤지컬을 직접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이 뮤지컬은 1986년 베를린에서 초연한 그립스(GRIPS) 극단의 Linie Eins를 한국적 상황에 맞게 번안한 작품이다. 1990년대 서울의 거리를 배경으로 연변에서 온 한 처녀가 만나는 잡상인, 깡패, 창녀, 가출소녀, 전도사를 통해 당시의 사회 모습을 웃긴 모습으로 풍자했다. 총 4,257를 공연한 이 작품으로 김민기는 2007년 독일 정부로부터 괴테 메달을 받았다.
김민기는 신인 배우들을 발굴하고 그들과 함께 긴 시간 고된 연습을 한 끝에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그는 공연에 참여한 배우와 연주자 무대 담당자 모두에게 정당한 보수를 지급했고 정규직들에게는 4대보험을 지급했는데 이는 당시 공연계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학전을 거쳐간 배우와 가수는 수백명에 이르는 데 그 중에 문화계에서 큰 역할을 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김민기는 배우들에게 좋은 기회가 생기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마음껏 나가라며 배우들이 모두 자기가 원하는 좋은 길로 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래서 극장의 이름은 배울 학(學)자에 밭 전(田)자인지도 모른다. 한 방송의 다큐멘터리footnote 에 출연해 김민기가 배우들을 진정으로 대하고 아꼈던 일들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그만 나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런 사람이었다니.

뮤지컬 <지하철 1호선> 포스터. 사진 제공: 학전
김민기는 인기가 많던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갑자기 그만 둔 뒤에 ‘고추장 떢볶이’ ‘우리는 친구다’ 같은 어린이극에 집중했다. 돈이 안 되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 어린이들의 시선으로 만든 뮤지컬 공연이라고 생각했다. 어린이들이 편하게 즐기도록 관람료를 낮췄고, 단체로 무료 초대를 해서 학전에는 부담이 됐다.
2023년 가을 김민기는 암 진단을 받았다. 그의 건강이 나빠진데다가 학전 소극장은 재정 상태가 더 나빠져 결국 2024년 3월 문을 닫게 됐다. 김민기는 2024년 7월 21일에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운구차가 대학로 학전 앞에 섰다. 극장 주변에는 그의 무대에 올랐던 배우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운구차에서 내린 유가족은 김민기의 영정을 들고 학전 소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고인이 33년을 정성스럽게 가꾼 학전을 한 번 더 바라볼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 유가족이 다시 차에 오르고 운구차가 떠나기 시작하자 주변에 서있던 배우들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게 ‘아침 이슬’을 함께 불렀다. 자신들을 진정으로 대하고 아꼈으며 늘 앞에 서기 보다는 뒤에서 돕는 ‘뒷것’이 되기를 원했던 친구에게 작별을 고했다.
생애 첫번째로 만든 음반을 말도 안되는 이유로 압수 당하고, 자기 이름으로는 공연도 작곡도 제대로 못하게 되어 젊은 시절을 빼앗겼고, 수도 없이 경찰에 잡혀가 매를 맞아야했었지만 어떻게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아름다운 노래들과 사람들을 웃겼다가 웃기는 뮤지컬 작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하루는 경찰에 잡혀가 매를 맞는데 내가 이제 죽는구나라고 느꼈단다. 그러다가 아픈 감각이 멀어지고 때리는 사람에게 오히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이 순간이 삶의 전환점이었고 그는 자신에게 어려움을 준 이들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했다. 짐작컨데 그래도 가슴 답답했던 때가 많았을 것이다. 힘을 가진 이들이 마음대로 자신의 예술을 처분하고, 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았는가. 아마 그렇게 답답한 마음들과 싸운 끝에 그런 아름다운 노래가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한번도 그가 직접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본적이 없지만, 그의 노래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내 곁에 있었다. 그의 노래와 삶을 생각하면서 노래 ‘아름다운 사람’을 불러 보았다. 노래에 등장하는 비 오는 저녁 처마 밑에서 홀로 서 있는 아이를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 애처롭고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주註
- 다음의 책에 김민기의 작품 전체와 해설, 비평이 실려있다. Carter J. Eckert가 번역한 영어 가사도 수록되어 있다. 김창남 엮음, 《김민기》, 한울, 2020.
- SBS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2024년 방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