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 말씀이 뭘 뜻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돕는 열쇠이다. 하지만 이 가르침을 오늘 실제의 삶에서 적용할 길을 찾기란 쉽지만은 않다.

맹렬한 서구 개인주의의 산물인 우리는 산상수훈을 개인을 위한 안내서로 읽어보려고 하지만 이내 실패하고 만다. 산상수훈에 기록된 말들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실천하라고 주신 삶의 방식이라는 걸 인정하지만, 정작 조각난 일상의 삶에서는 그 말씀을 따라 살 희망을 잃고 만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라’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라’ 같이 결코 만만하지 않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직면하게 될 때는 그것을 실제 삶에서 실천할 수 없는 이유를 합리화하려고까지 한다.

산상수훈 , 성숙한 교회 공동체에 대한 그림

그러나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단순히 우리 개개인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공동체가 성숙해지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그림으로 그려준 것이 산상수훈이다. 독일 신학자 게르하르트 로핑크가 일깨워주듯이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시는 구속의 일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한데 모으는 일도 포함된다.2) 이 일은 고대 이스라엘의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자손에서 시작되었으며 열두 부족을 상징하는 열두 제자로 이뤄진 작은 공동체를 이끄셨던 예수님도 실행하셨다. 오순절 이후 제자들이 세상 곳곳으로 보내졌을 때에는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 하나님 백성의 일부가 되라는 초청을 받았으며 그때부터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은 출신 민족의 제한을 받지 않게 됐다.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생각하면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우리 자신이나 남을 판단하는 새로운 규칙이 될 수 없다. 그와 반대로 산상수훈은 그리스도를 닮아 사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보여주는 비전이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어떻게 형제자매들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나누며 주류 문화와 다른 방법으로 더불어 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예수님이 거듭해서 ‘너희는 이렇게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고 하신 말씀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수사적 표현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 백성들의 길과 세상의 길이 어떤 대조를 보이는지 그려내고 계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소금과 빛의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산상수훈의 윤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뤄진 특정한 공동체에서 시작되는 느린 변화에 뿌리를 두고 밖으로 퍼져 나간다. 아마 예수님이 ‘남을 판단하지 마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뜻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마 7:1-5)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을 찾고, 그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길을 따라 살면서 눈 안에 있는 들보를 빼내는 일에 집중해야 하는 사람은 우리 자신 아닐까? 이웃이나 세상을 판단하거나 그들을 바로잡으려 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웃들뿐 아니라 심지어 적(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부르심을 증명하는 최고의 방법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변화의 힘을 지닌 예수님의 지혜가 어떻게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지를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각자의 교회 안에서 서로가 산상수훈의 지혜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예수님을 구현해 낼 수 있을까? 나는 10년 넘게 인디애나폴리스의 도시 교회인 잉글우드 기독교 공동체 교회의 일원으로 지내왔다. 우리 역시 같은 질문을 품고 길을 모색해 온 경험이 있어 다음의 세 가지 원칙을 실행해 보기를 제안한다. 정주(定住), 대화, 그리고 일과 안식 사이의 리듬이다.3) 이 원칙들은 우리를 예수님이 찾으시려고 했던 것들을 찾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 폭력을 안기지 않고 오히려 고통 받는 길을 선택한 예수님의 길을 따르도록 강권하는데, 이 원칙들을 실행하려면 인내가 필요하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썼다.

그저 한쪽 구석에 가서 홀로 나만의 ‘예수님 일’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진정으로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최종의 일에 참여하고 싶은 열망이 있다면 그 목표에 걸맞은 길을 가야만 한다. 그 길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4)

공동체를 일구는 원칙 1 : 뿌리 내리기

이 세 가지 원칙은 인내가 필요한 예수의 길을 따르도록 우리를 가르친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하시는 주된 일이 정말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라면, 우리는 교회 공동체나 특정한 장소에 ‘뿌리 내리는 일’〔定住〕을 소중하게 여겨야 할 거다. 성 베네딕토 수도회가 중요히 여기는 정주 원칙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이오와 주 더뷰크에 있는 미시시피 성모 마리아 베네딕토 수도회는 정주의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평생 지역 공동체에 머물기로 서원한다. 함께 살며, 함께 기도하고, 더불어 일하고, 함께 휴식한다. 그리고 가장 이상적인 상황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려는 유혹을 뿌리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할 길이란 존재하지 않는 탓이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생각은 종종 환상으로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열 일을 제쳐놓고 대화를 통해 평화를 되찾을 길을 모색한다. 그러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법을 배운다. 자기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었음을 인정하고, 특정한 것만을 가려 좋아하는 습관을 버리고, 용서한다.

사실 나는 ‘정주하는 삶’의 결핍이 안겨주는 고통을 몸소 체험했다. 잉글우드 교회 공동체에 오기 전까지 10년 동안 4개 주 12곳의 다른 주소에서 살았으니 말이다. 철저한 개인주의 풍조에서 자란 나는 20대를 줄곧 내게 제일 어울릴 만한 교육과 직업을 선택하면서 자기중심적인 목표만 쫓으며 보냈다. 대학을 갔고, 여름 방학 인턴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국제적 기업의 직원으로 일했으며, 대학원에 진학했고, 교회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을 사귀기는 했지만 그런 길을 좇은 대가도 치렀다. 사실 나는 고립되어 있었고, 사람들 모임이나 공동체와 연결되어야 할 끈은 뚝 잘려 있었다. 우리가 정말 사도 바울이 표현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라는 부르심을 받았고 그 길을 가길 원하지만, 정작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은 쉴 새 없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긴다면 그 몸이 정말 건강해질 수 있을까? (고전 12:12-31) 베네딕토 수도회의 서원이 일러주듯이 정주를 통해 우리는 평화를 발견한다. 그리고 어떤 비용을 들이더라도 서로 화해를 이루는 노력을 하게 된다.

공동체를 일구는 원칙 2 : 대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도록 성숙해지는 데 도움을 주는 두 번째 원칙은 ‘대화’이다. 대화가 기독교가 실천하는 핵심적 원칙이라고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니더라도 진정한 대화의 능력을 급속도로 잃어가는 원자화된 문화에서 대화의 중요성은 더 커져만 간다. 최근 몇 년 동안 부쩍 당파적으로 변한 미국의 의회 문화를 보면 대화가 절실히 필요함을 실감한다. 대화를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신실해질 길을 적극적으로 찾게 된다. 그리고 정의를 향한 공동의 갈망을 표현한다. 바울이 표현한 몸의 그림을 감히 확대 적용해보면 이렇다. 몸의 각 부분의 움직임을 안내하기 위해 신경세포들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가 이뤄지듯이 교회 안에서도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이끎 아래 멤버들 사이에 항상 교환과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

대화는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성경의 이야기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로 대화를 하며 성경을 읽어감으로써 우리는 회중으로서, 개인으로서 물려받은 신학적 유산을 짚어나간다. 그러면서 특정한 지역에 모인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소명을 성찰한다. 노스캐롤라이나의 더햄이라는 곳에 있는 ‘엠마오 길 공동체’의 팀 콘더와 다니엘 로즈는 함께 모여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 어떻게 함께 사는 삶을 바꾸어 놓았는지를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소통과 공동체를 향한 열정은 물론이고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는 분명한 의지를 길러 나갔다. 물론 이런 능력을 타고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공을 들이고 노력해야 배울 수 있는 기술들이다. 우리는 공동체의 힘이 성경의 가르침을 함께 해석하려는 이런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길러진다고 믿는다.5)

20여 년 전 잉글우드 교회는 전통적으로 드리던 일요일 저녁 예배를 그만뒀다. 대신 교회 식구들과 함께 다목적실에 모여 의자를 둥그렇게 둘러놓고 앉아서 대화하기 시작했다. 이 일요일 저녁 모임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모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조마조마했고, 고성이나 야유가 오가는 건 보통이었으며, 심지어 모임 중간에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이 대화 모임을 지켰다. 그러자 우리 자신이 차차 변해갔다. 대화는 우리의 문제를 마술처럼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신학이나 실제 삶의 문제에 대해 본질적인 의견 차이가 있더라도 서로 신뢰하며 대화로 길을 찾아 나갈 수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일요일마다 서로 대화를 해나가다 보니까 주중에 벌어지는 다양한 일상에도 공동의 노력을 들이게 됐다. 우리가 나누던 대화는 일상의 삶 속의 대화로 번졌고 구체적인 실제 삶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뜻하지 않은 일들도 벌어졌다. 당시 지역 사회의 번영된 미래를 도모할 길을 찾고 있던 차에 이웃들과 대화할 힘까지 얻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인디애나폴리스의 이 지역은 많은 사업체와 교회, 그리고 가족들이 떠난 곳이었다. 그런데 대화의 분위기가 자라나자 지역사회가 천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 일로 이 지역에서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을 간증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에게 큰 기쁨이었다.

공동체를 일구는 원칙 3 : 일과 안식 사이의 리듬

우리를 그리스도 안의 삶으로 깊이 이끄는 세 번째 원칙은 ‘일과 안식 사이의 리듬’ 찾기였다. 기술 중심의 시대는 우리로 하여금 불편과 노력을 최소화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그분을 닮기 원한다면 부지런히 일하게 되지 않을까? 물론 일 걱정으로 소진되어서는 안 되겠다.(마 6:25-33) 반대로 끊임없이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일을 멈추고, 쉬고, 놀고, 꿈꾸고, 함께 사색하는 안식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개인주의 문화의 독특한 현상 하나는 안식일에 대한 가르침이 대부분 개인이나 가족만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원래 안식일은 사회적 풍습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규정짓게 만든 것도 바로 이 안식일 전통이다. 공동체로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유대교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 전통적으로 안식일은 풍성한 세 끼 식사, 노래, 친구 및 가족과의 친교, 명상, 그리고 회당에서 함께 모여 드리는 기도로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도 안식일은 수많은 유대인 공동체에서 축제의 날이며 한 주간의 여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잉글우드에서 공동의 일은 함께 나누는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우리는 어린이집, 공동체 개발 사업, 회계 사무실과 출판사업, 그리고 그 외의 비영리사업을 운영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여러 교회처럼 우리도 공동체로서 안식일을 함께 지키는 게 진정 어떤 모습일지 상상조차도 하지 못하는 처지다. 바쁜 일상을 보내는 공동체 일원들은 자주 지치곤 한다. 그런 우리에게 안식일에 제일 가까운 것은 위에 소개한 일요일 저녁의 대화 모임일 것이다. 그 대화 모임을 통해 일을 멈추고 함께 사색하고, 서로 더 잘 알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이 그렇듯이 많은 멤버에게 이 시간은 일주일 중에서 가장 값진 순간이다. 이를 통해 안식일에 대한 이해도 계속 깊어질 거라고 믿는다.

이 세 가지 원칙을 교회에서 열심히 실행에 옮길 때 우리는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가는 길에 첫걸음을 딛게 된다.(마 7:14) 그리고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우리를 위해 그려주신 온 인류와 창조물이 어우러지는 축복과 평화의 삶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다.


*이 글은 복음과 상황에도 실렸습니다. http://www.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