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한 교육학 교수가 모든 교육 방법 뒤에는 인간 존재라는 그림이 깔려 있다고 설명한 뒤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여러분 대부분은 삼십 년이나 그보다 더 긴 시간을 현장에서 가르치는 동안, 실제 여러분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인간 존재에 대한 어떤 그림이 여러분의 교육에 영향을 끼쳤는지 묻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겁니다.”
오늘 미국의 교육에는 어떤 그림이 깔렸을까? 그것은 기계의 그림일까 아니면 인간의 그림일까? 공통 핵심 학습기준(Common Core State Standards)이 미국의 각 주를 휩쓸면서 교육의 큰 그림이 바뀌고 있다. 이 기준은 학생들에게 대학진학과 직업 생활을 준비하도록 돕고,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생각과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는 데 도움을 주려고 고안됐다고 한다. 물론 그런 것들은 중요한 목표이기는 하지만, 이 학습 기준이 그런 목표에 도달하는 데 실제 도움을 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들은 똑같은 ‘제품’ 아닌 독창적 존재
표준 또는 기준이라는 말은 아이들과 학교보다는 기계나 공장의 세계에 더 어울리는 용어이다. 공통 기준이라는 용어가 처음 교육계에서 소개됐을 때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봤다. 그랬더니 이 용어는 주로 건축 자재를 말할 때 등장하는 개념이었다.
표준이라는 말은 우리가 ‘똑같은 제품’을 만들려고 할 때 필요한 개념이다. 하지만 아이들이란 하나같이 똑같은 틀에 끼워 놓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들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지만, 동시에 다양한 독창성을 지닌다. 모름지기 교육이란 아이들의 공통점과 개성 모두를 길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을 마치 어른의 시간 개념에 따라 측정될 수 있는 작은 기계 정도로 여기는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만약 어떤 아이가 학습기준이 정해 놓은 과정에서 뒤떨어지게 되면 다시 같은 학년을 반복하거나 특수 교실에서 수업을 받아야 할 수도 있다. 그뿐 아니라 담당 교사는 벌칙을 받거나 심지어 해고될 위험도 있다. 딱딱한 기준과 많은 것을 좌우하는 시험에 기반을 둔 교육이 아이들을 온전한 인간 존재로 자라게 도울지 의심스럽다.
유아 교육자로서 필자는 공통 핵심 학습기준이 특히 유치원 아이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한다. 왜냐하면 학습 기준의 내용이 아이들의 발달 과정에 통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아이들은 유치원 과정을 마칠 때쯤 90개의 학습목표를 달성해야만 한다. 그중에는 적절한 목표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사실은 더 높은 학년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교사들은 자신이 주도하는 장시간의 수업, 연습문제지 사용, 숙제와 시험에 더욱더 의존해야만 한다. 그러면 교사가 아이들 주도의 놀이와 실습을 통한 탐구 활동을 지원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게 된다. 정작 그런 시간이 아이들이 활동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준비하는 데 아주 중요한데도 말이다.
공통 핵심 학습기준이 현장에서 입증된 사실에 터잡고 있다고 하지만, 유치원 아이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실제 수치라는 게 사실은 아주 빈약한 것이다. 단기간에 성취해버리는 목표는 몇 년 뒤면 흐지부지해지기 마련인데 우리 입맛대로 어린아이들의 발달 과정을 왜곡하고, 공식적인 기준과 부담이 높은 시험으로 아이들의 자유로운 발달을 방해할 이유가 꼭 있을까? 많은 선생님이 이런 새로운 학습 기준과 방법이 절절하지 않다는 걸 잘 알면서도 정작 필요한 변화를 이끌 자유가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 상황을 지속하면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기계적 용어로 바라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주변의 세상을 대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만나는 컴퓨터보다 자신이 못나다는 생각마저 들 수 있다. 인간의 두뇌는 컴퓨터와 비슷하다는 어른의 설명을 듣지만, 사실은 사람의 두뇌가 먼저 생겼고 컴퓨터는 모방일 뿐이라는 말을 들을 기회는 없다. 또한 인공지능을 칭송하는 얘기를 듣지만, 마음과 생각을 결합하는 인간의 지성과 비교하면 그게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 설명해주는 어른도 없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전화와 태블릿 기기를 건네주지만 정작 자장가나 동요를 들려주는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이 위안과 동료애를 느끼기 위해 기계를 찾더라도 놀라지 말기를….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을 인간의 세상이 아닌 기계의 세상에 살아가기 어울리는 존재로 만들고 있는 거다.
스스로 자라는 아이들, 진정 필요한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건 무엇일까?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며 열심히 배우고 싶어 하는 강한 욕구를 타고난다. 몸과 감정, 생각을 사용해 세상을 헤쳐나가는 법을 배우려는 의지 또한 타고난다. 또한 자신의 발달을 주도하고, 다음 단계에는 무엇을 하고, 그리고 그걸 어떤 방법으로 이룰지 각자 나름의 감각을 타고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 살짜리 아이가 이제는 걸어야 할 때임을 알게 되고, 두 살짜리 아이가 이제는 말할 때라는 걸 알게 될까? 아이들에게 이런 걸 하라고 어른이 말해줄 필요는 없다. 아이들은 벌써 마음속 깊이 다음으로 정복할 기술이 뭔지 알고서 다른 이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기술을 습득하고 키워 나간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오직 자기 힘으로만 성숙한 인간 존재로 자라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이들은 우리의 사랑과 따뜻함을 보호막 삼아 해로움을 이겨내는 경험을 하면서 자란다. 아이들은 우리가 정해주는 적절한 울타리와 길라잡이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아이들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탐색할 자유도 필요하다. 또한 아이들은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진실한 삶의 진가를 아는 어른이 필요하다. 마음이 강하면서도 여린 어른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자기 나름대로 삶의 길을 찾아 나갈 거라고 믿어주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목적을 성취할 거라며 기다려주는 그런 어른 말이다. 짧게 말해 아이들은 우리 어른이 몸소 온전한 인간 존재가 되기 위해 애쓰길 바란다. 그래서 자신들에게도 똑같은 것을 가르쳐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면 온전한 인간 존재가 된다는 건 뭘 의미하는 걸까? 그건 우리의 온 존재–우리의 생각과 느낌, 의지–가 활발히 움직이면서도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 장점이 있는데 각 장점은 온전한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몸과 영혼, 영을 지니며 이 땅에서 세상을 받아들이듯이 똑같이 하늘의 세상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두 개의 세계를 잇는 다리처럼 서 있다. 다리를 부드럽게 뻗어 땅을 딛고 서 있고 동시에 두 눈은 드넓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은 서로를 찾아간다.
이러한 인간 존재의 그림은 우리에게 묻는다. 내 앞의 이 아이는 어디에서 와서 내 팔에 안기게 된 걸까? 영국의 작가이자 목사였던 조지 맥도널드는 이렇게 묘사했다.
사랑하는 아기야, 너는 어디에서 왔니?
모든 곳에서 이곳으로 왔어요.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시 <영원불멸의 예찬>(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에서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며 “영광이 자욱한 지상으로 온다. 우리가 아기일 때 천국은 바로 곁에 있다…”라고 적었다. 갓난아기를 안아보면 그 아이가 지나온 거대한 여행이 느껴진다. 아기는 꽃잎을 한 잎 한 잎 막 피우려는 꽃봉오리처럼 무한한 삶의 가능성으로 가득하다. 이런 영광이 어떻게 몇 년이 지나면 고작 일련의 시험 점수로 전락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있을까?
우리의 교육은 온전하고 통합된 인간 존재를 부인하는 사고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우리 앞에 다가오는 아이 한 명 한 명을, 그리고 인간 생명의 경이로움을 감사하게 여겨야 할 때다. 워즈워스는 이런 감사한 마음으로 시를 끝맺는다.
삶을 지탱하는 인간의 마음에 감사합니다
인간 마음의 부드러움과 기쁨, 그리고 두려움에도 감사합니다
보잘것없는 작은 꽃일지라도
때로는 눈물로도 감당 못할 깊은 생각을 안겨줍니다.
*이 글은 <복음과 상황> 292호에도 실렸습니다. (20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