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누가복음 2:11) .
구원의 역사 속에서 크리스마스처럼 우리에게 기뻐할 것을 명백히 요구하는 사건은 없었다. 두려움과 걱정으로 가득 찬 세상에, 문제투성이인 우리의 삶 가운데, 환희의 소식이 울려 퍼진다. “오늘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다!”
외로움과 죽음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자의 등장만한 희소식이 또 있을까.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선물을 주시는 분, 살아계신 하나님과 사귐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탄생했다! 자신의 삶과 죽음을 바쳐, 하나님을 기꺼이 맞아들일 모든 사람을 그분께로 인도할 이가 여기 태어났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의 죽음의 서막이었다. 초라한 탄생과 즉각적인 헤롯왕의 박해 그리고 베들레헴의 참혹한 학살은 구유에 놓인 아기의 미래가 어떠할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들은 십자가를 가르키는 표지판이자 동시에 하나님과 우리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될 것임을 약속하는 징표였다.
천사는 단순히 그리스도가 태어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너희에게 태어났다”고 말한다. 천사는 단지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하지 않았다. “너희에게 전해준다”고 했다.
이것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이다! 우리에게 자유와 구원을 안겨주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실 분이 여기에 있다. 이 작은 아기가 우리의 구주이다.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려 이 땅에 태어나셨기 때문이다. 그의 삶과 죽음, 그의 행위에 담긴 정신은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한다. 이게 복음이다. 예언자들이 노래했던 것은 바로 다윗의 씨에서 태어날 이분, 하나님의 영이 내려와 아들임을 드러낼 이분이다.
오직 믿음의 눈을 가진 자만이 살아계신 아들, 부활하신 아들을 알아볼 수 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진정한 믿음, 축복받는 믿음은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굳건히 믿는 믿음이다. 복음서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태어나, 우리를 위해 고통을 겪고 죽었다고 말한다. 천사는 단순히 그리스도가 태어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너희에게 태어났다고 말한다. 천사는 단지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하지 않았다. 너희에게 전해준다고 했다.”
예수의 탄생은 빛의 지표를 따라 일어났다. 탄생하신 주님과 하나가 되길 원한다면, 우리의 죄를 포함해 전부를 그분께 드려야 한다. 루터는 신비주의자 앙겔루스 실레시우스의 오래된 시구를 빌어 우리에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천 번을 베들레헴에 태어났을지라도 당신 마음속에 태어나시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직도 영원히 버림받은 존재입니다.”
루터에게 구세주는 죄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분이다. “보라. 그리스도는 우리의 출생을 가져가 그분의 탄생으로 바꾸신다. 우리가 순결하고 새롭게 되라고 그분의 탄생이 우리 것인 양, 우리에게 주신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처럼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라도 된 듯 이 탄생을 기뻐하며 찬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가 되고 우리는 그분의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아기가 나셨다. 우리에게 아들을 주셨다. 우리에게, 바로 우리에게, 태어나셨다!
출처: When the Time Was Fulfil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