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5년 3월 취리히로 이사온 젊은 부부는 나중에 자신들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만든 성경공부 모임을 알게 된다. 이 모임은 시작된 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종교개혁에 관한 토론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초대교회의 단순함으로 돌아가기를 고민했고, 세례는 성인만이 받아야 한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그해 봄 미카엘은 성인으로 세례를 다시 받았고, 이런 행동은 당시 시민법과 교회법을 어기는 사형까지 가능한 범법 행위였다. 미카엘과 아내 마가렛타는 이제 새롭게 일어난 운동, ‘재-세례파’ 또는 아나뱁티스트의 일원이 된 것이다.
1490년 남부 독일 지방에서 태어난 미카엘은 프라이버그 근처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거기서 신부로 봉직했다. 마가렛타는 베긴 수녀회 소속이었다. 이 두 사람은 각기 당시에 일어난 종교개혁 사상을 받아들였다는 걸 깨닫고, 함께 전 생애를 바쳐 그리스도만을 따를 것을 약속한다.
취리히에서 미카엘은 아나뱁티스트 그룹의 리더가 되었다. 이 활동이 불허되면서 부부는 도시로부터 추방되었다. 모임을 지속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미카엘은 마틴 부처를 비롯한 다른 주류 종교 개혁가들을 찾아간다. 그러나 이 부부의 생각은 당시 주류 개혁가들에 비해 훨씬 진보적인 입장이었다.
오늘 저는 당신의 도움으로 진리를 증거하며 제 피로 봉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당시로선 불법적인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입문했지만 모두 흩어져 숨어 있는 상태였다. 결국 1527년 2월에 미카엘은 진보적 인사들의 모임에 참여하게 된다. 이 모임이 일어난 스위스 도시의 이름을 따라 슐라이타임 신앙고백 초안이 마련되었다. 이 초안은 그들 운동의 토대가 되었으며, 산상수훈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 글에서 신자들의 자발적인 세례만이 유일하며 종교에 대한 어떠한 강제도 거부하고 비폭력과 교회 내 서로 돌볼 책임을 천명했다.
부부는 이 모임에서 돌아온 직후 오스트리아 군대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아나뱁티스트라는 죄목에 더해 적국인 오토만 터키 전쟁에서 배신자로 낙인 찍혀 기소되었다.
만약 터키군이 오고야 만다면 그들에게 저항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고 성경(마5: 21)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무찔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 전쟁이 옳아서 내가 참여해야 한다면 그리스도 신앙을 모르는 터키인들에 대항하기 보다는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다른 경건한 교인을 박해하고 잡아 죽이는 이들에 대항할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자 당시 오스트리아 대공은 군인들을 풀어 소요에 대비해야 했다.
닷새 뒤인 1527년 5월 20일에 미카엘은 고문 받고 산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처형장으로 걸어가면서도 구경꾼들에게 회개를 촉구했고, 판관들을 위해 기도했다. 남편이 죽은 후 8일후에 부인 마가렛타도 넥카 강에 수장되었다. 그녀는 차라리 남편과 함께 화형 당하길 원했다.
미카엘은 화형장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만이 길이요 진리이십니다. 제 흠이 드러난 바가 없으니, 오늘 저는 당신의 도움으로 진리를 증거하며 제 피로 봉합니다.”라고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