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한 마을에 이반이라는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반은 작은 정원이 딸린 오두막에서 루블스라는 개와 부모를 여읜 여섯 살 된 조카 피터와 함께 살았습니다. 이반은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살인하거나 남의 걸 훔치지 않았고, 거짓말도 안 하고 남의 일에 끼어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 화를 잘 냈고 늘 지저분했으니까요. 조용했지만 입을 열면 기분 나쁘고 악에 받친 말을 뱉었습니다. 이웃에게는 관심도 없었고 친절을 베풀기는커녕 이웃이 베푸는 작은 호의나 친절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웃도 관심을 끊고 이반이 하는 데로 내버려 둘 수밖에요.
루블스는 무서운 주인 곁에 얼씬거리지도 않았습니다. 마을을 거닐 때면 저만치 뒤에서 주인을 따랐고, 다만 집 지키는 개의 의무를 하기 위해 낯선 사람을 보면 무조건 짖었습니다. 그통에 이반은 개를 집에만 두고서 음식 찌꺼기만 던져줬습니다. 쓰다듬기는 고사하고 칭찬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피터는 삼촌이 말이 없고 화를 자주 냈기 때문에 늘 조용했습니다. 친구도 없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삼촌을 너무나 무서워한 나머지 얼씬거리지도 않았고, 피터 역시 부끄럼을 많이 타는 터라 누구와 잘 얘기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피터는 숲에서 마냥 뛰어놀거나, 혼자서 놀고는 했습니다. 피터는 때때로 회초리를 대는 삼촌이 무서워 늘 겁을 먹고 지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집은 지저분하고 우중충한 데다가 삭막하기까지 했습니다. 제법 훤한 창이 두 개가 나 있었지만 창틀은 때가 묻고 얼룩이 져서 지저분했습니다. 나무 서까래는 검게 그을렸고 벽과 모서리는 온통 거미줄 투성이었습니다. 바닥에는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와 비 온 날 신발에 묻어 들어온 진흙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난로 주변뿐만 아니라 냄비와 주전자도 그을음에 쩔어 있었고, 침대에는 이부자리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습니다. 상 위에는 담배 꽁초가 어지럽게 버려져 있는 데다가 곳곳에 담뱃불 자국이 나 있었으며 의자들은 반쯤 부서져 있었습니다. 차마 쳐다보기 미안한 광경이었지요. 집 밖이라고 형편이 나은 건 아니었습니다. 문지방은 헐고, 잡초는 사방으로 뻗쳐 자라고, 채소들도 아무렇게나 자라고, 꽃은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더 심했습니다. 루블스는 바싹 마르고 더러웠습니다. 게다가 삐죽삐죽 덥수룩한 털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더기를 걸친 불쌍한 피터의 길게 자란 머리카락에는 침대에서 붙은 지푸라기가 얽혀있었습니다. 너무나 더러워서 아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지경이었으니까요. 이반은 몸집이 아주 컸는데 빗질하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과 턱수염이 얼크러져 끔직해 보였습니다. 오래 된 옷은 까만 때에 절어 있었습니다. 어찌나 지저분한지 만나는 사람마다 고개를 돌리고 코를 찡그리며 재빨리 지나쳐 버리려고 했습니다.
쌀쌀한 삼월, 모두가 봄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어느 날 이반은 마을에 콩을 가지러 갔습니다. 콩을 가지고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 가고 있는 데 저만치서 한 남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평소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갈 참이었는데 곁눈질로 본 낯선 사람의 모습이 신기해 이반답지 않게 뚫어지게 쳐다봤습니다. 왠지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릴 수 없었습니다. 그 낯선 이는 젊고 키가 훌쩍 했으며, 투박한 농부 옷을 입고, 양을 지키는 목자의 지팡이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백합꽃 다발을 안고 있었는데 그 꽃은 들에 자라는, 하루에 꽃을 하나씩만 피우는, 아름다워서 쳐다보면 눈이 부실 것 같은 백합꽃이었습니다. 이반은 멈추어 섰습니다. 그러자 이 낯선 사람은 이반의 헤진 장화와 주름지고 더러운 얼굴을 가만히 쳐다 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날이요, 친구.”
이반은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보시오?”
이반은 여전히 대답없이 고개를 들어 사내의 얼굴을 쳐다봤습니다. 백합꽃처럼 빛나는 얼굴이었습니다. 이반은 다시 백합꽃다발을 쳐다봤습니다.
“그 꽃 있잖아요. 그렇게 아름다운 꽃은 본 적이 없어요.”
“꽃 한 송이는 당신 거라오.”
“내 거라고요?” 이반은 놀랐습니다.
사내가 꽃을 내밀자 이반은 의심하며 소리쳤습니다. “뭘 원하는 거에요? 난 가난하다구요.”
“아무 것도 필요 없어요. 이 꽃을 깨끗하고 순결하게만 간직하면 되요.”
이반은 때묻은 손을 외투에 문지르고서 백합꽃을 받았습니다. 줄기를 손으로 감아 쥐고서는 이제 자기 것이 된 소중한 꽃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른 채 우뚝 서서 마냥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얼마 후 고개를 들어 쳐다 보니까 사내는 벌써 멀리 가버렸습니다. 이반은 조심스럽게 백합꽃을 가지고 집으로 왔습니다.
이반은 집에 돌아왔지만 지저분하고 어지러운 방 어디를 봐도 꽃을 둘만한 곳을 찾지 못 했습니다. 꺼진 난로불 옆에 맥없이 앉아 있던 피터는 슬며시 일어나 경이로움에 젖어 있는 삼촌을 가만히 쳐다봤습니다. 피터는 겨우 말을 꺼냈습니다. “어디에서 찾은 거에요?”
이반은 속삭였습니다. “낯선 사람이 거저 주면서 깨끗하고 순결하게 보관만하면 된다고 하더라. 어쩌지?”
피터는 들떠 대답했습니다. “꽃을 담을 걸 찾아야죠! 저기 높은 선반에 삼촌이 작년 부활절에 놓아둔 빈 포도주 병이 있잖아요.”
“그러면 내가 병을 내릴테니 너는 꽃을 들고 있어라. 아니야, 손이 너무 더럽잖아! 우물가에서 씻고 와!”
급히 밖으로 나간 피터는 잠시 후 깨끗한 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꽃을 건넨 이반은 피터가 꽃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자 소리를 꽥 질렀습니다. “잠깐! 얼굴이 너무 더러워!” 그러고는 행주를 우물가에서 빨아 와서는 피터의 얼굴을 어색한 손길로 문질렀습니다. 얼굴 다 닦고 뒤로 물러난 이반은 조심스럽게 하얀 백합꽃의 냄새를 맡고 있는 피터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바라봤습니다. 처음 보는 소년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반은 그제서야 몸을 뻗어 선반 위의 병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더러운 병은 거미줄로 꽉 차 있었습니다. 이반은 밖으로 사라졌다가 깨끗하고 빛나는 병을 갖고 다시 나타나서는 백합꽃을 담아 창문턱에 올려 놓았습니다. 두 사람은 꽃을 바라봤습니다. 꽃이 자아내는 빛은 침침하고 거무죽죽한 방을 밝혔습니다. 문득 이반은 지저분한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백합꽃이 이런 곳에서 살 수 없어! 청소를 하자.”
“저도 도울게요.” 피터도 거들었습니다. 집 치우는 일은 하루 넘게 걸렸습니다. 창을 닦고, 벽과 바닥을 쓸고 문질렀습니다. 냄비와 주전자의 찌든 때를 벗겨내고, 의자를 고치고, 탁자를 닦고, 이불은 먼지를 털어 밖에 널고, 난롯가의 타일은 불빛을 받아 광을 낼 때까지 문질렀습니다. 타일의 빛을 받은 냄비와 주전자는 답례로 윙크를 했습니다.
모처럼 낮의 햇볕이 창가에 비쳤고 어두운 서까래까지도 빛을 받아 빛났습니다. 백합꽃은 창문턱에서 내내 빛을 냈습니다. 청소를 끝낸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자기 집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기쁨과 경이로움에 압도됐습니다.
“우리 꼴은 이런 집에 어울리지 않아. 이제 우리 차례다.” 이반이 말했습니다.
둘은 이제 친구가 됐습니다. 열심히 몸을 씻은 두 사람은 그럴싸한 옷을 사려고 마을로 갔습니다. 내내 멀리서 쫓아오는 루블스를 본 이반은 생각했습니다. “개 모습이 꼴불견이야. 더러운데다가 털은 삐쭉삐쭉하고. 이 집에 어울리지 않아. 목욕을 시켜야겠어.” 하지만 루블스는 슬금슬금 빠져나가 저만치서 겁을 먹고 서있기만 했습니다. 이반이 아무리 부드럽게 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꼬박 반나절 넘게 구슬린 다음에야 개의 마음을 얻은 이반은 피터와 함께 루블스의 털을 씻기고 빗었습니다. 맛있는 저녁을 얻어 먹은 루블스는 움츠리지도 낑낑거리지도 않았습니다. 반대로 이반을 존경과 사랑의 눈으로 쳐다보면서 꼬리로 땅바닥을 치고 이반의 손을 핥았습니다. 그러자 이반은 마음 속에서 알 수 없는 빛이 빛나는 걸 느꼈습니다.
집안은 나아졌지만 밖은 어떻게 하죠? 부서진 창문턱과 잡초만 빽빽하게 자란 정원은 어떻게 하고요? “우리 집을 저런 정원 안에 살게 할 수는 없지.” 이반은 신이 나서 말했습니다. “함께 치우자고.” 두 사람은 소매를 걷어 올렸습니다.
루블스가 웅크리고 앉아 두 사람을 쳐다봤습니다. 그때 한 이웃이 지나가다가 멈춰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습니다. 처음에 그 이웃은 이반과 피터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뭘 그렇게 뚫어지라고 보세요? 여기 와서 우리 백합꽃을 보시라고요. 아니, 그러지 말고 아내분을 먼저 데리고 오세요.”
놀란 이웃은 서둘러 아내를 데리러 갔습니다. 마침내 늙은 사내와 그의 조카와 친해질 기회가 왔기 때문입니다.
일곱 날 동안 백합꽃은 창문턱에서 환한 빛을 냈습니다. 그 주변에 살아있는 것은 모두 변했습니다. 그리고 여덟 번째 날, 꽃은 사라졌습니다. 구석구석 살펴도 흔적조차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피터를 바라보며 이반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백합꽃이 아직도 이 아이의 얼굴에서 빛나고 있어. 보이지는 않아도 백합꽃은 여전히 살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