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캘빈 쿨리지 대통령이 미주리 주 캔자스 시에 자유 기념비를 헌정하는 데 15만 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평화 기간 중 미국에서 가장 많이 모인 집회라는 기록을 세웠다. 백 년 전 8월에 발발한 전쟁에 참전한 수백만의 미국인들을 기리기 위한 집회였다. 탑에는 “자유와 조국 수호를 위해 세계 대전에 참전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라고 쓰여 있다. 1
이 영광스런 기념비에 포함되지 않은 네 명의 신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우스다코타 출신의 삼형제인 데이빗, 조세프, 마이클 호퍼와 조세프의 처남 야곱 위프였다. 농부였던 그들은 군복 착용을 거부함으로 앨커트래즈 섬 교도소의 쇠사슬에 매달리는 처지가 된다. 후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이런 행위를 막연히 “야만스럽고, 중세적”이라 했다. 조세프와 마이클 호퍼는 1918년 후반에 캔사스 주 포트 레번워스 교도소에 이송된 후에 사망한다. 미국의 자유 기념비가 캔사스 시에 헌정되기 8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그 당시 그들의 죽음은 묵인됐다. 그들의 고향에서 발간되는 주간지 <프리만 커리어>는 8쪽 분량에 울프 크릭 지역 소식의 일부로 두 사람의 죽음을 한 문장으로 다뤘다. “록포트의 야곱 호퍼의 두 아들이 워싱턴 캠프(원문 그대로 발췌)에서 사망했고, 고향에서 장례를 지냈다.”2
그리고 아래 단 다음 칼럼으로 넘어가는데, 그 기사는 “노이에-후터달 교회는 중국 선교사 바텔을 위해 종이 절단기를 구입하기로 결정했다”는 것과 “샘 K. 호퍼는 부엌과 차고를 지었다”는 내용이었다.
록포트 공동체 묘소를 방문한 이들이라면 후터라이트 공동체 남성 교우들의 묘석의 크기나 재질은 동일하더라도 조세프와 마이클의 묘석에 새겨진 순교자라는 문구를 눈여겨보게 될 것이다.
야곱 위프와 데이빗, 조세프, 마이클 호퍼는 날이 흐린1918년 5월 25일에 징집되었다. 30살 야곱은 제일 연장자였고, 아내와 세 아이들을 두었다. 그 아래 연장자인 데이빗은 28살 기혼으로 다섯 자녀를 뒀고, 마이클은 24살로 아내 마리아와 갓 출산한 첫딸 메리의 아빠였다. 가장 어린 조세프는 23살로 각각 1살, 2살된 아이들과 곧 출산을 앞둔 부인이 있었다. 징병 위원회는 그들에게 가족 생계를 전적으로 책임진 가장이냐고 물었으나 아니라는 답을 들었다. 그들이 부재할 경우 공동체 교회가 가족을 책임질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솔직한 응답으로 확실한 군 면제 기회는 사라져 버렸다. 부양 자녀들 둔 아버지는 거의 징집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록포트 공동체의 남자 네 명은 공동체 집을 떠나 흙길로 나섰다. 알렉산드리아 인근에서는 지역 주민들이 전쟁터로 향하는 젊은이들을 응원하기 위해 애국 집회를 열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 집회의 주 강사인 수폴즈 지역의 한 판사는 워싱턴 캠프 루이스 기차를 기다리는 젊은이들에게 “자유와 인류를 위한 전투”에 참여하므로써 “모든 국민이 자랑스러워할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하라고 했다.3
폭풍우가 치자 군중들은 비를 피할 곳을 찾았다. 그들이 다시 모이자 고관들과 군인과 가족들은 악단의 활기찬 음악에 맞춰 기차역으로 행진했다. 누가 보더라도 알렉산드리아의 젊은이들은 입영 열차에 열정을 갖고 탑승하는 것 같았다. 이미 수백 명의 남자들은 승차하여 창밖으로 몸을 내밀며 손을 연신 흔들어댔다. 대다수 사우스다코타 주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날은 서부를 처음으로 볼 수 있는 모험의 시작이요 축제였다.
그러나 이들을 주의 깊게 관찰한 사람이라면 록포트 후터라이트에서 온 네 명과 근처 공동체에서 징집된 앤드류 붤츠는 다른 젊은이들과 다름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들은 검정옷과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이는 세속과 분리하며 하나님의 평화로운 왕국을 공동체로 살며 실천하겠다는 의지의 상징이었다. 이 후터라이트들은 목회자들과 가족들로부터 캠프에 보고는 하되 전쟁을 증진시키는 복무는 거부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군인으로서의 어떤 병무도 할 수 없었다. 군복무는 원수를 사랑하고 폭력을 거부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었다.
사우스다코다와 미국 전체가 애국심에 휩싸인 상황에서 이런 확신은 경의를 받기는커녕 큰 적대심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었다. 몇 주 전에는 근처 핸슨 카운티의 자유대출위원회가 전쟁 채권 매입을 거부한 후터라이트 공동체의 백마리 수소와 천마리 양들을 불법적으로 몰수했다. 1918년 5월 25일 이 남성들이 워싱턴 주 캠프 루이스로 떠난 당일, 사우스다코다 국방위원회는 독일어를 ‘적국의 언어’라 규정하며 사용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4
후터라이트 사람들은 예배와 학교에서 독일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했으니 이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호퍼 형제와 야곱 위프는 이를 안 상태에서 1,200명의 사우스다코다 젊은이들과 기차에 올라탔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캠프에 도착하는 데로 병무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신앙고백 증언에 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징병 서류를 받은 이들은 미국 정부에게 더 이상 민간인이 아니었다.
서부로 향하는 15량짜리 기차에서 네 명의 남자는 침실칸에서 다른 칸으로 몸을 움직였다. 이들이 평화주의자요 독일어를 사용하는 후터라이트임을 알아본 신병들은 야유를 질러댔다. 결국 차장은 이들만의 작은 객실을 찾아주었다.
조세프 호퍼가 아내 마리아에게 보낸 첫 편지에는 토요일 저녁에 얻은 조용한 공간에 대한 안심이 담겨있었다.
진심 어린 사랑의 입맞춤으로 시작하오. 지금, 나는 사랑하는 당신을 마주보고 이야기할 수 없기에 연필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몇 가지 쓰렵니다. 우리가 이 광폭한 세상과 아무 상관이 없으니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어제 저녁에 그들은 우리를 차량에서 내몰아 다른 차량으로 쫓았다오. 거기 마저 못 머물게 되자 작은 객실을 얻어 줘야 했지. 그렇게 우리 넷은 우리끼리만 있게 되었답니다. 우리는 방해 없이 앤드류 붤츠와 함께 우리 외로움 가운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인도받으며 선한 일로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길 원했소. 그렇기에 정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여, 우리를 하나님 손에 맡기고 이제 평화 가운데 있으니 최선을 다하여 모든 것을 해결하실 거라 믿습니다.
그날 늦게 기차가 몬태나 주디스 분지에 도착하자 누군가 객실문을 두들겼다. 한 무리의 신병들이 후터라이트들과 얘기 좀 나누고 싶다고 했고, 그중 두 사람은 고향에서 안면이 있는 사람인 윌리엄 댄포스와 제임스 알버트 몽고메리였다. 후터라이트들은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나중에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댄포스와 몽고메리 그리고 나머지는 뛰어 들어와 차례로 후터라이트들의 수염과 머리를 밀어 버렸다. 객실에 난입한 이들은 후터라이트들을 정규군 대열로 환영하기 위해 “무료 이발” 서비스를 한 거라고 했으나 후터라이트들에게는 충격적인 폭행이었다.5
이런 일이 있은 직후에 마이클 호퍼는 아내 마리아에게 편지를 썼다.
몬태나 주디스 분지에 도착하자 그들은 우리에게 내리라고 했소. 우리는 하차를 거부하며 지휘관이 직접 명령하지 않는 한 듣지 않겠다고 했지. 그러자 그들이 직접 왔다오. 그게 댄포스요 몽고메리였어. 야곱 위프에게 말하길 우리 모두 내려서 그들에게 오라고 명했지. 그래서 야곱 위프가 내렸어. 그들은 야곱을 기다려 우리 앞에 있는 다른 차량으로 끌고 갔지. 그의 머리와 수염은 완전히 깍인 상태였어. 그들은 그런 식으로서 우리를 다뤘어.
우리 구세주께서 우리 이전에 본이 되시었으니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야 합니다. 정말 큰 고통에 처했기 때문이라오.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우리 앞일을 아십니다.
기차는 며칠 뒤 워싱턴에 더 이상의 사고 없이 도착한다. 캠프 루이스는7만 에이커에 상당하는 인상적인 신병훈련소로 서부 전역의 신병들이 모여들었다. 1917년 여름 내내 1만 명의 노동자들이 건설한1,757개의 건물과 50마일의 도로, 37마일의 수도관이 연결된 사실상의 도시였다. 5월 28일 화요일 호퍼 형제들과 야곱 위프는 수만 명이 훈련을 받고 있는 카키색 도시에 입소했다. 이중 다수는 보병으로 유럽으로 파병되고 있었다.
사우스다코다의 후터라이트는 입소 즉시 영창 54호에 수감됐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알파벳 순서로 줄을 서고, 성명, 출신지, 다른 기본 정보들을 포함한 입대 배치서를 준비하라고 했다. 그들은 이런 절차가 미국 군대의 군인이 되는 길이라는 걸 알아차리곤 줄외로 비켜서며 “군인 성명서”라고 쓰여진 입대 배치서 작성을 거부했다. 군관들은 네 남자에게 명령을 이행하도록 설득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뉴턴 베이커 전시 장관은 각 남성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길 기대했는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도 식당이나 유지 보수 같은 일에 참여해야만 했다. 캠프 지휘관들은 당연히 캠프 생활 참여를 완전히 거부하는 이들에게 분노했다.
캠프 루이스가 전쟁을 대비하는 동안 후터라이트 형제들은 영창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다음은 데이빗 호퍼가 영창에서 아내 애나에게 쓴 편지다.
당신은 집과 농장, 아내와 아이들과 떨어져 있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할거요. 난 차마 우리가 처한 비참한 상황을 묘사할 수가 없다오. 이미 여러차례 심한 일을 당한 상황이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분께 서약한 걸 끝까지 지킬 수 있다면 우리의 몸과 목숨을 대가로 치룰 수 있어야겠지. 우리 구세주께서 마태복음 5장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말씀하셨소. 이제 이 간단한 글을 마쳐야만 한다오. 뭘 쓰는 것도 조심해야 하거든. 자주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상황이라오. 우리는 5년에서 25년간의 감옥형으로 군법재판에 회부되었소. 우리 공동체 식구들이 서두른다면 뭔가라도 할 수 있지 아닐까 싶소.
캠프 당국은 후터라이트 형제들을 명령 불복종 혐의, 두 가지의 전시 법률 위반으로 기소했다. 군법재판에서 장교들은 네 남자들에게 줄을 서서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도록 설득한 자신들의 노력을 제시했다. 야곱 위프가 첫 피고인으로 증언대에 섰다. 모국어가 독일어인데다 초등 교육만 받은 견문이 좁은 농부가 군법관들 앞에 섰다. 검사는 그들이 어떤 식이라도 왜 군복무를 거부하는지 정확히 알고 싶었다.
문: 군복무 중 비전투 부대에 참여할 의향이 있는가?
답: 아니오. 할 수 없습니다.
문: 이유는?
답: 글쎄요, 그건 어쨌거나 모두 전쟁을 위한 거잖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미국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농장에서 일하는 겁니다.
문: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라니?
답: 음, 스스로를 도울 수 없는 사람들 말입니다.
문: 평생 불구가 된 군인도 포함되나?
답: 네. 그들도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이지요.
문: 만약 당신이 부상당한 군인들을 돌볼 의무대 같은 곳에 복무한다면, 당신의 양심과 교회의 가르침이 그것을 허락하겠는가?
답: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군인이니까 싸울 거고 그게 전쟁에 도움이 될 것이니,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문: 주변에 부상당한 군인들이 있어도 도울 수 없다고? 그들이 회복되어 전쟁으로 돌아갈까 두려워 그들을 도울 수 없다는 건가?
답: 글쎄, 전쟁에 도움이 될 테니까요.
문: 정부가 지정한 농장에 배치되어 군인들을 위해 밀을 재배할 의향이 있는가?
답: 아니요.
그러자 검사는 비폭력에 대한 의지가 가정까지 확대되는지 알고 싶었다.
문: 당신의 종교는 싸움을 허용하는가?
답: 아니요.
문: 주먹질도 안 한다고?
답: 글쎄요, 우리가 천사는 아니니까, 사내애들이 다툴 때도 있고, 벌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 신앙이 허락하는 건 아닙니다.
문: 그렇다면 어떤 자가 네 누이를 공격하거나 폭행을 저지른다면 당신은 싸울 건가?
답: 아니요.
문: 죽일 텐가?
답: 아니요.
문: 그럼, 어떻게 하겠나?
답: 음, 일단은 동생을 떼어낼 수 있다면, 그 자를 붙잡아야겠죠. 내가 남자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할 겁니다. 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지요. 우리는 살인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신앙을 전적으로 위배하는 겁니다.
호퍼 형제들의 진술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판결만 남았다. 데이빗 호퍼는 아내 애나에게 재판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정말 힘든 시험이었소. 사랑하는 아내여, 이런 일은 우리가 아끼는 형제들과 아버지들과 원로들이 절대로 겪어서는 안되는 일이었소. 우리 같이 젊은 형제들이 믿음으로 수행할 일이지. 우리는 12명의 배심원들 앞에서 신앙을 지켜야 했다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 목소리와 지혜와 잔잔한 맘을 허락하셨지. 난 집에 있는 것처럼 두려움이 없다오. 아내여,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비참한 상황에 처한 우리를 인도하실거요. 우리가 어디 있든지, 아주 곤궁한 처지에 빠지더라도.
판결은 재판이 끝난 지 5일 만에 내려졌는데 캠프 루이스에 도착한 지 3주도 채 안된 때였다. 네 명 모두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불명예 제대, 일체의 급여 손실과 감옥행이었다. 마이클 호퍼는 마리아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토요일에 그들이 와서 우리가 캘리포니아 앨커트래즈 감옥에서 20년 동안의 노역 형을 받았음을 알려줬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우리 앞날을 아시지요. 우리가 그분을 믿고 허락하신 것이 무슨 일이든 인내심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완전히 굴복했습니다. 그분께서 어떤 짐을 주시든 견딜 수 있는 출구 또한 마련해주실 겁니다…. 슬픔에만 젖어 있다면 우리의 십자가와 고통이 더 어려워질 거요. 하나님께서 거기(앨커트래즈)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실 거니까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들이 불을 통과할 때 불길이 태우지 않도록 곁에 계실 거라고 약속하셨소.
호퍼 형제와 야곱 위프는 전쟁 중에 군법회의에 회부된 504명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중에 일부였고, 재판 결과 503건의 유죄판결과 1건의 무죄판결이 나왔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사람들 중 약 142명은 메노나이트, 아미쉬, 후터라이트로 추정되었다. 한편, 캠프 루이스에 도착한 후 호퍼 형제와 야곱 위프로부터 분리됐던 앤드류 붤츠도 재판을 따로 받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강제로 설득하려 취해진 극단적인 물리적 조치들을 밝혔다: 찬물에 강제로 담기고, 피부가 긁히도록 바닥 판자에서 끌린 일 등. 결국 그는 군복을 입은 남자들과 함께하는 일이 아니라면 캠프 정원에서 혼자 일하기로 동의했다.
캠프 루이스에서 두 달을 지낸 7월 25일, 호퍼 형제와 야곱 위프는 앨커트래즈로 떠났다. 둘씩 사슬에 묶여, 무장한 소위 네 명의 호위를 받으며 이틀 뒤 샌프란시스코 만의 악명 높은 섬에 도착했다. 별칭이 '더 록(바위)'이며 공식적으로 '미국의 징계 병영, 태평양 지부'로 지정된 앨커트래즈는 군범죄자 수용소 세 곳 중 한 곳이었고, 자유로운 운영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령관인 개러드 대령의 지휘 아래, 수감자들은(‘제자’로 불림) 직업훈련 프로그램, 클래식 음악회, 4,600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도서관(어울리지 않게 1917년 레이디스 홈 저널 전체 세트가 있었다)을 즐겨 찾았다. 그러나 네 명의 후터라이트들도 곧 알아챘지만 이 자유는 '태만자'라 경멸받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게까지 확대되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네 명의 남자들은 섬 꼭대기 감옥으로 가기 위해 길게 이어진 급커브 길을 올랐다. 그 안에서 그들은 제복을 입거나 일하는 것을 거부했다.
교도관들은 이들을 층층이 연결된 감방 복도의 계단을 따라 '구덩이'으로 알려진 지하 감옥의 독방으로 데려갔다. 각 사람은 높은 지점이 1.8미터인 경사진 벽돌 아치로 들어갔다. 감방 자체는 1.95미터 너비에 2.5미터 깊이였다. 감방은 차갑고 축축했지만 그들은 옆 바닥에 놓여 있는 제복 입기를 거부했다. 첫 며칠 동안 그들은 매일 반 컵의 물은 받았지만 음식은 받지 못했다.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나자 그들은 각자의 문 창살에 두 손이 교차되어 쇠사슬로 묶이게 됐다. 쇠사슬은 발가락만 바닥에 닿도록 당겨져 있었는데, 이것은 '수갑 높이 매달기'로 알려진 역사적 고문 기술이었다. 데이빗 호퍼는 팔의 통증을 덜기 위해 변기 통을 가까이 당겨 위에 올라서려 했다고 했다. 낮과 밤 구분 없이 어둠 속에 살던 남자들은 정기적으로 간수들의 방문을 받았다. 적어도 한 번 간수들은 남자들의 팔과 등을 매듭진 채찍으로 후려쳤다고 한다. 처음 5일 동안 독방에 감금되었던 네 남자들은 간수들에 의해 바깥으로 인도되었으나 재킷을 입을 수 없었다. 그들의 팔이 너무 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세프 호퍼가 아내 마리아에게 쓴 앨커트래즈 편지에는 막연한 어려움만 나온다. 조세프는 그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독방의 상세한 경험을 생략했다. 어쩌면 교도관들이 편지 검열을 통해 불쾌하거나 비난받을 만한 세부사항들을 삭제한 건 아닐까?
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여전히 건강하다오…. 소중하고 사랑하는 아내여, 난 여전히 감옥에 있고 우리가 다시 만날 수나 있을지 기약이 없습니다. 다시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이 세상이 아니라면 저 세상에서 봅시다.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할 곳에서.
그러나 그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육체의 모든 욕망을 뒤로 미루고, 세상의 증오와 조롱과 함께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히브리서 12장에서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 앞에 구름 같은 증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함께 기쁨을 찾은 모든 사람들이라면 고통을 겪어야 함을 당신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당신과 이 편지를 읽는 모든 분들에게 축복을 빕니다. 아멘. 여긴 모든 게 이전 캠프처럼 군대식이라오.
호퍼 형제들(여기서는 15238번, 15239번, 15240번으로 호명)과 야곱 위프(15237번)가 앨커트래즈에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는 기록은 거의 엿볼 수 없다. 속옷 차림으로 젖은 콘크리트 위에서 잠을 자거나, 쇠사슬을 매고 몇 시간씩 서 있거나, 간수에게 구타당했다는 언급이 편지에는 없다. 대신에 마이클 호퍼는 이렇게 썼다.
사랑하는 아내여,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서로를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바라건대,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고 영원히 기쁨 속에 거할 수 있는 다음 세상에서 봅시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의 날, 주민들은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올드 랭 사인(송년가)'을 연달아 부르며 종전을 기념했다. 그들은 전국을 휩쓸었던 전염병을 연상케 하는 독감용 마스크를 쓰고 노래를 불렀다. 지금이야말로 뉴스를 만끽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휴전협정 3일 후, 후터라이트들은 다시 한 번 쇠사슬에 묶인 채 무장한 군관들의 경호를 받으며 포트 레번워스로 떠났다. 다음은 기차에서 마이클 호퍼가 쓴 마지막 편지이다.
은혜와 평강이 당신과 함께하길 빕니다. 포트 레번워스로 가는 지금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소.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모른다오.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우리가 다시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있을지 아실거요. 우리는 고행 길을 또 걷고 걷는구려. 하나님께 간곡히 간청했다오. 하나님께서 뜻하지 않으시면 우리 머리카락 한 올도 떨어뜨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다면 다음 세상에서 보게 될 거요.
조세프도 마찬가지로 마지막 편지를 마리아에게 보냈다.
우리가 휘갈겨 쓴 편지를 보면 당신도 우리 사기가 얼마나 저하됐는지 잘 상상할 수 있을 거요. 우리는 마치 파도에 부딪치며, 바다가 죽은 사람을 토해내는 때에 서 있소. 당신이 이걸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사랑하는 아내여, 이 모든 게 이때를 위한 것이었나 봅니다. 기차가 너무 흔들려서 편지를 제대로 쓰기가 힘듭니다. 이제 마무리를 지으렵니다. 당신과 우리 소중한 아이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믿음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진심 어린 인사를 전하는 바요.
남자들은 11월 19일 자정 무렵 포트 레번워스에 도착했다. 다음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다른 증언들도 있지만, 데이빗 호퍼는 거리를 지나 병영까지 행군한 후 죄수복이 도착할 때까지 밖에서 오래 기다렸다고 했다. 마이클과 조세프 호퍼는 도착 직후 가슴에 심한 통증을 호소하여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한편 데이빗 호퍼와 야곱 위프는 포트 레번워스의 작업을 거부함으로 다시 한 번 독방에 감금되었다.
마이클과 조세프의 병세가 악화되자 데이빗은 가족들에게 빨리 오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가족들은 11월 28일에 도착했다. 조세프는 겨우 간신히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고 마이클도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조세프에게 면회를 간 마리아는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처음에 교도소 관계자들은 마리아가 시체를 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버텼고, 드디어 관에 다가갈 수 있었다. 충격적이게도 남편의 시신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며칠 후 12월 2일 마이클 호퍼가 죽었다. 데이빗은 형제들의 시신과 함께 사우스다코타로 돌아가라고 석방되었다.
징계 병영의 외과 사무국은 두 사람의 사망 원인을 폐렴으로 꼽았는데, 이는 당시 그들이 앨커트래즈에 수감되었을 때 샌프란시스코 전역에 스페인 독감이 감옥을 휩쓸었다는 이유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후터라이트 교회는 이들의 사망 원인을 몇 달 동안의 학대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후터형제회 연대기에는 이 남성들이 "미군의 잔인한 학대 때문에 감옥에서 죽었다"고 명시되어 있다.6
미국 정부의 어떤 대표자도 호퍼 형제의 가족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이들은 후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교회 동료 신도들은 신속하게 윌슨 대통령과 뉴턴 베이커 전시 장관에게 직접적인 책임을 물었고, 과도하게 열성적이었던 신병 모집 캠프의 장군들을 비난했다. 다른 목격자들은 이 사건에 대해 덜 관대했다. 새터데이 리뷰(Saturday Reviews)의 국제란 편집인 프랭크 해리스는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썼다.
고귀한 신념을 위해 순교한 호퍼 형제와 그들이 당한 살인에 책임이 있는 베이커 장관 중에 누가 더 나은 사람인지 의심의 여지가 있습니까? (전시) 장관 앞으로 일련의 증거들이 연이어 날이면 날마다, 몇 달 연속으로 제출되었고, 마침내 전쟁이 끝난 지 한 달 후인 1918년 12월 6일에 베이커 장관은 잔인한 체벌을 금하는 명령과, 지하감옥 창살에 죄수들의 수갑을 채우는 등의 가혹행위 금지를 내릴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베이커 장관은 이미 그러한 고문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7
베이커 입장에서는 하루하루가 중요한 전시 중이라 신속한 군대 동원이 요구되는 상황을 해리스가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있다고 반박했을 것이다. 베이커 자신은 유감 표명에 인색했다. "나도 [전쟁]의 참상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위험과 의무의 자리보다 안전과 이익의 자리를 선호하는 사람들 그리고 지적 또는 정서적으로 양심을 외치고, 반대를 외치는 편에 선 그 누구도 동정할 수 없다."8
1919년 4월 야곱 위프는 마침내 '안전과 이익의 자리'에서 풀려나 동료들의 무덤을 직접 찾았다. 육군 법무장관실로부터 관대한 처분을 받은 그는 체포 후 11개월 만에 봄 파종 시간에 맞춰 귀가했다.
돈 피터스의 수채화 삽화
주註
- 인용 및 정보 출처: 자유 기념비(Liberty Memorial)의 국립1차 세계 대전 박물관. www.theworldwar.org.
- “Wolf Creek,” The Freeman Courier, December 5, 1918.
- The Alexandria Herald, May 31, 1918.
- The Alexandria Herald, May 31, 1918.
- The Alexandria Herald, June 21, 1918.
- The Chronicle of the Hutterian Brethren, vol. 1. (Rifton, NY: Plough Publishing, 1987), 807.
- Frank Harris, My Life and Loves (New York: Grove Press, 1963), 946.
- Reply from Newton D. Baker to socialist convention, Baker Papers, 1918–1919 (no date specifi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