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에 다벨(영국에 있는 브루더호프 공동체 중 하나)을 방문하신 홍승표님은 흔쾌히 다벨 후기를 보내주셨습니다. 대학 이후의 길을 조심스럽게 모색하는 승표님에게 믿음과 용기를 기원합니다.
돌이켜 보면 방문에 앞서 너무 욕심을 부렸던 제가 생각납니다. 인생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을 잡고 사회로 나아가야 할 시기에 다벨로 떠났기에 그 때의 저는 다벨에서 무언가를 배워야만 하고 느껴야만 한다는 의무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아무런 의무의 도전 없이 다벨 분들과 그 시간동안 온전히 그곳의 삶을 함께 해야했음이 옳았는데... 소설의 3인칭 시점의 화자 처럼 멀리서 지켜만 보면서 저를 다 내어주지 않고 무얼 배워야 할지만 찾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3주를 지내다 보니 다벨에 있는 제가 몹시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20대 이후로의 제 삶의 화두는 똘레랑스였습니다.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며, 완전히 이해 할 수 없지만 완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화두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또 그렇게 살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벨에서 지내다 보니 그렇지 못한 제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름을 틀림이라 여기며 조금의 이해도 완전한 사랑도 하지 못하는 제가 다벨에 있었습니다. 그때에도 샬롬(청년)들에겐 가벼운 입으로 나와의 삶의 방식이 다름에도 이해 못하는 부분이 있지만 완전히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 부끄런 기억이 납니다. 그때의 저의 얘기에 눈물을 보이던 친구에게 죄스런 맘이 들기까지 합니다.
특히나 종교적 측면에서 같은 신을 믿고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삶의 중심이 다른 다벨 분들의 삶은 제겐 큰 충격이였으며 종교적 삶이 아닌 종교적 의무를 채우며 살아가던 저에겐 다벨 분들의 신앙은 감히 제가 다가설수 없는 성역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주님의 얘길 할 때면 전 언제나 선을 그어버려습니다. 난 성직자로도 이런 공동체의 일원으로도 삶을 살지도 않고 또 그런 삶을 원치도 않는다며 다벨의 삶의 방식과 가치들은 제게 적용하기엔 어폐가 있다고 일종의 종교적 중도를 지향한다고 핑계를 둘러대며 부대끼는 대화는 피해갔습니다.
그렇게 모자람을 보이는 저임에도 다벨은 고향집과 같이 항상 따뜻히 대해 줬습니다. 3주의 생활 뒤 다벨을 도망나와 다시 돌아 갔을 때도 모든 분들이 따뜻히 반겨 주시고 돌아가던 날 악수를 청하시며 잘 돌아가라 해주시던 그 많던 분들 덕에 2달을 무사히 잘 보내고 아니, 채우고 돌아왔습니다.
그런 저임에도 머무는 동안은 물론, 떠나 있는 지금까지도 안부를 물어주시며 저를 생각해 주시는 다벨 분들을 통해 얻은 한가지가 있습니다. 제 삶의 모든 행보가 제가 이해할 수 있고 주님도 이해할 수 있는 활동과 일에 쓰여지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저의 지금의 신분은 대학생입니다. 그것도 졸업과 취업에 맘 졸이는 한국의 많은 청년과 다르지 않은 졸업을 한 학기 앞둔 4학년입니다. 다벨에 다녀오기 전에 저는 학점과 화려한 스펙을 따기 위해 절절매는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삶의 뚜렷한 주관과 목표도 없고 앞으로의 삶을 무엇에 쏟아부어야 할지 확신도 없는 불안정체였습니다.
다벨에 있는 동안 샬롬의 채드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낸지 한 달쯤 후에 보게 된 청년이었습니다. 런던의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친구였는데 여름방학 동안 다벨에 온 것입니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 채드에게 언제쯤 런던으로 돌아가냐고 물어봤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다벨에 계속 머문다는 것이었습니다. 채드가 다니던 곳은 영국에서도 유수한 대학들 중 하나였고 졸업을 얼마 안 남겨논 상태여서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채드의 생각은 간단하지만 확고했습니다. 공동체가 지금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채드에겐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있는 좋은 학교의 졸업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신 안의 확실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저보다 몇살 아우인 채드가 제가 좇고있는 것들에서 자유로울 정도의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는 것이 부러웠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그 확신이 주님이라는 것이 저를 더욱 작아지게 하는듯 느껴졌습니다.
다벨에 있는 동안 지금은 돌아가신 클라우스 할아버지께서 제가 떠나기 전날 밤 집으로 부르셔서 주님을 위해 자신의 것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역시나 핑계를 대자면 저는 성직자나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기에 현실과 타협하며 제 스스로 그 말씀을 필터링 하였습니다. 저의 사회에서의 역할과 생산활동이 사회와 이웃에 도움이 되게 쓰일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이 현실에 살며 그분을 따르는 길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앞으로의 길을 찾다 보니 사회에 어떠한 일원이 되어야겠다는 단기적 목표가 명확해졌습니다.
이 후 1년여를 호주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도망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만 다벨의 경험 이후 도망나온 것치곤 꽤 보람된 시간을 보내고 있어 매일 하느님에게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제가 이루고 싶던 것을 이루고 경험하고 싶었던 것을 모두 할 수 있게 이끌어 주시는 그분을 통해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일에 제 능력을 쓸 수 있도록 성장 할 수 있는 1년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여전히 마음을 열지 못하고 현실의 것들을 놓지 못하면서 여전히 종교적 중도를 걷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삶의 방향을 정했다는 것으로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다벨 분들이 보시기엔 여전히 부족하겠지만 다시 한번 핑계를 대겠습니다. 저는 성직자로도 공동체의 일원으로도 살 수도 살지도 않기에 현실의 것을 놓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중도에서 벗어나 주님의 길을 온전히 걸어 나갈 수 있도록 항상 생각하며 노력하며 살겠습니다. 변하가겠습니다.
클라우스 할아버지께서 제 맘이 변해야 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