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3
진정한 사랑은 성령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이런 진리를 못 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진정한 사랑은 어설픈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무시하는가 하면, 반대로 진정한 사랑을 찾는 데 골몰한 나머지 전체를 보지 못한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성령에게서 나온다. 부부가 진정한 사랑이라는 복을 경험한다면 어떠한 시험을 만나더라도 해가 갈수록 사랑이 깊어진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리고 수십 년 결혼 생활 뒤에도 두 사람은 상대를 행복하게 해 주는 데서 여전히 기쁨을 찾을 것이다.
남녀가 더 깊고 친밀한 관계를 원하면 보통은 서로 감정과 공통의 가치관, 공유하는 이상과 서로를 향한 호감 면에서 그러한 관계를 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사항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성령께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경험을 열어 주신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부부간의 사랑이 열렬한 감정에 바탕을 둔다면 아름다울 수 있지만, 열렬한 감정은 어이없을 정도로 금세 절망적으로, 불행하게 변할 수 있다. 결국 열렬한 감정은 기초로서는 불안정하다. 인간 수준에서만 가능한 하나 됨과 사랑만 찾는다면 우리는 정처 없이 흘러가는 구름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찾는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불붙이실 신실한 사랑은 끝까지 견딜 수 있다. 성령께서는 견디지 못하는 것들을 다 태워 버리신다. 진실한 사랑은 우리 안에서 나오지 않고, 밖에서 우리 위로 부어진다.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페터 리데만Peter Riedemann은 1540년에 발간한 《신앙고백Confession of Faith》에서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은 세 가지 차원을 아우른다고 설명한다. 첫째 차원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 성령과 우리 영의 결혼이다(고전 6:17).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이 스스로 이루는 공동체로, 영과 영혼 안에 있는 친교와 정의가 여기에 있다. 셋째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연합으로, “모든 사람이 보고 이해할 수 있다”(엡 5:31).
바울은 남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아내들을 사랑하라고 말하면서 결혼과 영적 하나 됨을 나란히 놓는다(엡 5:25). 그리스도인들에게 결혼은 하나님과 교회의 하나 됨이라는 가장 깊은 하나 됨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결혼에서는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나라라는 하나 됨이 가장 중요하다. 이런 하나 됨 위에 세울 때만 결혼은 지속 가능한 힘을 얻는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결혼은 성도 두 사람을 예수님과 그분의 나라로 더 가까이 이끈다.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하거나 목사가 주례를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부부가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가려면 각자 먼저 하나님나라를 섬기고, 그 통치 아래 있는 교회 공동체에 온전히 헌신해야 한다. 먼저 신앙과 영이 진심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난 후에야 영혼과 몸 역시 진정으로 하나 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적어도 전통적으로) 배우자 중 한쪽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경우에는 결혼을 축복하기를 주저주저한 교회들이 많았다(고후 6:14).
여기서 한 가지 밝혀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경건한 결혼의 요구 사항은 인간적 응답 체계가 충족시켜 줄 수도, 원칙이나 규칙이나 법규가 해결해 줄 수도 없다. 그런 요구 사항은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하고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서 성령에 따라서 살아가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하나 됨에 비추어서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 뜻의 핵심은 하나 됨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기도에서 자신과 아버지가 하나이듯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요 17:20-23). 하나님이 하나 됨을 바라셨기에 세상에 오순절 사건이 일어났다.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새로운 삶의 열매는 영적으로만 나타나지 않았다. 삶의 물질적이고 실질적인 측면 역시 영향을 받았고, 급격한 변화까지 일어났다. 사람들은 소유를 모아서 팔아 사도들 발 앞에 놓았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에게 있는 것을 모두 나눠 주고 싶어 했다. 아무도 가난으로 고생하지 않았으며, 모든 이가 필요한 것을 다 받았다. 자기 것을 움켜쥐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어떠한 법이나 원칙이 이러한 변혁을 좌우하지 않았다. 예수님도 이런 일이 어떤 식으로 일어나야 한다고 콕 집어서 말씀하지는 않으셨으며,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말씀하셨을 뿐이다(마 19:21). 오순절에는 그런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성령께서 임하셔서 믿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이 하나 되게 하셨다(행 2:42-47).
우리 힘으로는 두 마음이 하나가 되는 영적 하나 됨을 이룰 수 없다. 그러한 하나 됨은 우리보다 위대한 것이 우리를 잡고서 변화시키도록 할 때만 일어날 수 있다.
결혼에 남편과 아내의 결합보다 훨씬 더 깊은 신비, 즉 그리스도와 그분 백성의 영원한 하나 됨이라는 신비가 담겨 있다. 진정한 결혼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하나 됨이 이러한 더 깊은 하나 됨을 반영한다. 결혼 이 단순히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이 아닌 까닭은, 하나님과 그분 백성의 하나 됨이라는 더 강한 결합이 결혼을 확정 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당신 백성의 하나 됨을 가장 우선으로 여겨야 한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러한 하나 됨을 세례식에서 확인하고, 주의 만찬을 기념할 때마다 재차 확인하며, 결혼식이 열릴 때마다 각자 상기한다.
결혼 서약이 그저 두 사람의 약속이나 계약에 불과하다면 얼마나 하찮게 되는지!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에서든 그리스도와 그분 교회에 충성하는 일을 결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오늘날 가정들의 상황은 지금과 사뭇 다를 것이다.
신앙이 있는 이들을 진정으로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사랑하는 이들과 사랑받는 이들 사이에 늘 그분이 계신다. 그들이 아무런 방해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시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따라서 죄가 결혼 생활에 들어와 사랑의 진실을 가릴 때 신실한 제자라면 변덕스러운 배우자를 따라가지 않고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따를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성령에게서 나온다.
감정적 사랑은 진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할 것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비추시는 분명한 빛을 가로막고자 할지도 모른다. 관계가 거짓되고 진실하지 않게 되어도 감정적 사랑은 그러한 관계를 그만둘 능력도 의지도 없다. 반면에 참된 사랑은 절대로 악을 따라가지 않으며, 진리 안에서 기뻐한다(고전 13:6). 남편과 아내 모두 결혼에서 감정 결속보다 신앙의 하나 됨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각자 이렇게 자문해야 한다. “먼저 예수님과 교회에 충 성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한다는 말인가?”(눅 9:57-60)
결혼한 부부의 하나 됨이 그보다 큰 교회의 하나 됨 아래 놓일 때 그들의 결혼은 새롭고도 더 깊은 수준에서 견고해지고 안정된다. 부부의 하나 됨이 모든 신자들의 하나 됨 안에 자리 잡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향한 사랑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이해할 때 중요하다. 영혼이 몸을 모양 짓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에는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숨결이자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핵심인 영혼은 몸을 각기 다른 형태로 만든다. 누가 더 우월하냐 하는 문제가 절대 아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는데, 어떻게 한 쪽이 다른 쪽보다 더 훌륭할 수 있는가? 그래도 차이는 있기에, 바울은 남자를 그리스도에, 여자를 교회에 비유한다(엡 5:22-24). 남자는 머리로서 그리스도의 섬김을 나타낸다. 여자는 몸으로서 교회의 헌신을 나타낸다. 소명은 차이가 있지만, 가치는 차이가 없다.
마리아는 교회를 상징한다. 마리아에게서 우리는 여자다움과 어머니다움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는다. 여자가 교회와 같은 까닭은, 말씀을 받아 지니고(눅 1:38),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에 생명이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일은 인간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숭고하다.
분명 남자와 여자 사이의 차이는 절대적이지 않다. 진정한 여성에게는 용감한 남성다움이 있고, 진정한 남성에게는 마리아와 같은 순종과 겸손이 있다. 하지만 남편이 머리이므로 아무리 약해도 남편이 앞장서야 한다. 이 말을 마치 남자는 지배자, 여자는 시종이라는 말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만일 남편이 사랑과 겸손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예수님의 정신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남편의 머리 됨은 횡포가 되리라. 머리는 몸에서 그 자리에 있지만 군림하지 않는다.
나는 결혼식 주례를 할 때마다 신랑에게 ‘모든 선한 일에’ 아내를 이끌겠냐고 묻는데, 아내를 예수님에게 더욱 깊이 인도하겠느냐는 질문이다. 마찬가지로 신부에게도 남편을 기꺼이 따르겠냐고 묻는다. 결국 이 질문은 두 사람이 함께 예수님을 따르겠냐는 질문인 셈이다.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참된 지도력은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이 사랑의 임무는 사실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남녀의 임무다.
바울의 말을 마음에 새긴다면 사랑이 지배하는 관계라는, 진정한 내적 하나 됨, 즉 남편과 아내가 마음으로 함께 하나님과 대 화를 나눌 때만 하나님이 그 결혼에 복을 주신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새로운 모습을 거듭 발견하며, 사랑 안에서 서로 섬기는 방법을 끊임없이 발견하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영원한 기쁨을 발견하리라. 초대교회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도 이렇게 썼다.
교회 앞에서 맺어지고 교회의 축복으로 확정 지은 결혼의 행복을 누가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사람 둘이 동일한 희망, 동일한 삶의 길, 동일한 충성의 맹세, 동일한 하나님을 위한 섬김 안에서 협력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멍에인지! 그들은 형제와 자매이며, 영혼과 몸의 분리 없이 한 몸으로 바삐 섬깁니다. 몸이 하나인 곳에 영 또한 하나입니다. 이들은 함께 기도하고 함께 무릎을 꿇습니다. 서로 가르치고 서로 참아 줍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함께 있고, 주님의 만찬을 함께하고, 불안과 박해와 회복 중에 함께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서로 열심을 냅니다. 그리스도는 보고 들으시며, 그분의 평화를 그들에게 기쁘게 내려 주십니다. 두 사람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들 가운데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의 《성, 하나님, 결혼》(비아토르)에서 부분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