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소망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나라’를 미래가 아니라 이미 지금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서로 격려하는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이러한 공동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나라에 대해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이 땅에서 미리 보여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가 머리인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릅니다.(고린도전서 12장 12-27절) 또 다른 성경에서는 이것을 모든 벽돌이 서로 들어맞게 쌓여져서 완성되는 집이라고 말합니다.(베드로전서 2장 4-12절)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작은 양무리라고 부릅니다. 그 속에서 모두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우며, 미래를 위한 전사로서 세상에 빛을 비추어 환하게 만드는 자들이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바를 증명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믿음을 삶으로 나타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나라는 현재 임합니다. 하나님나라는 미래에 임하듯이 지금 여기에 임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공동체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해서는 지금 확고한 신앙으로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근심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있어야만 합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파할 초기부터 이런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 이웃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누군가 세상에서 완전히 홀로 남겨진 채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고 사람들로부터 따돌림 당하며 근심 걱정과 삶의 무게를 짊어진 채 힘겹게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면 그에게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자유롭고 근심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 온 세상이 근심과 걱정에 깊이 빠져있습니다. 부유한 나라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는 이러한 근심과 걱정이 없을 수 있고 없어야만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할 때는, 서로 결속하고 하나가 되어 아무도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과, “우리가 하나 되고 연대하여 걱정과 염려를 추방합시다. 모두가 함께 나누고 도와 근심을 몰아냅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근심에서 자유로운 작은 모임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태복음 6장 32-33절)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후부터 사람들은 이처럼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된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를 추구해왔습니다. 사람들이 공동체적인 삶으로 함께 연합할 때 엄청난 능력이 생깁니다. 사유재산이란 개념은 자취를 감추고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완전히 하나 되어 서로에게 말합니다. “내 것은 곧 모두의 것입니다.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 모두가 나를 도울 것입니다.”(고린도후서 8장13-15절) 이처럼 공동체 삶 속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어 서로서로 책임지는 삶 속에서만 우리는 “염려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 가운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런 공동체를 시도해왔습니다. 하지만 구성원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한 번도 온전히 이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의도하신 참된 의미의 기독교가 이처럼 힘을 잃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영적인” 공동체-실제적인 삶의 필요를 외면하고 같은 이름의 교회 안에서 주일 예배만 드리는 공동체(편집자)-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공동체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일정기간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결국에는 갈라서게 됩니다. 공동체가 지속하려면 어떤 영적인 경험보다 훨씬 더 깊은 토대가 있어야 합니다. 만일 육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서 공동체가 되지 못한다면 영적인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요한일서 3장16-18절) 인간은 단지 영혼이 아닙니다. 우리는 살과 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먹어야 살고, 계절 따라 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도구를 함께 써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일해야 합니다. 각자 자신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가 되어 세상을 향해 “이제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 개개인은 자신을 위해 살기를 멈추고 형제와 자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외치는 일도 불가능합니다.
만일 육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서 공동체가 되지 못한다면 영적인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염려를 던져버리길 예수님은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이 가난과 비참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도무지 길을 찾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그저 믿음을 가지라고 요구합니다.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처한 이들을 찾아와서 이렇게 외칩니다. “그냥 단순하게 믿으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입니다. 천국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외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터무니없는 요구입니다.(야고보서 2장 14-18절) 하나님나라는 단지 죽음 이후의 미래의 나라일 수 없습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이것을 미래의 일로 여기고 있지만, 적어도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 하나 되길 힘쓰고 사랑하는 가운데 근심이 사라지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행동하며 기다리는 하나님나라>에서, 17장
배 사진: Kasia Lauwerijssen-Weglic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