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혼란의 시기에 순수하고 무고한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들이 목격한 것에 충격을 받은 채,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 질문합니다. “ 우리의 도움은 어디서 올까요? 누가 우리를 인도하고, 삶과 행동으로 본을 보여줄까요? 우리는 누구를 따라야 합니까?” 젊은이들과 나이든 이들은 수 많은 의심에 힘겨워하면서도 깊은 간절함으로 진정한 빛을 찾습니다. -나단 호프쉬(이스라엘 평화주의자)
2012년 3월 22일 저녁, 83세의 요제프 벤엘리에이저는 심각한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온 가족과 전 세계의 수백 명의 브루더호프 멤버들은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으로 충격에 빠졌습니다. 요제프에게는 자신이 한 때 부인했었지만 이후에 너무나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신속한 은혜의 길이었습니다. 노년에도 그의 모습은 새로운 회심의 열정으로 빛이 났더랬습니다.
요제프는 1929년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 하나는 나치 소년 부대가 거리를 행진하면서 부르는 노래에 뼈가 오싹해졌던 일입니다. “유대인들의 피가 우리의 칼에서 흐를 때…” 얼마 후 요제프의 가족은 독일을 떠나서 ‘그나마 안전한’ 폴란드로 향했습니다. 몇 년 후, 히틀러의 하수인들이 뒤를 쫓았습니다. 무장한 SS헌병들이 들어 닥치는 바람에 집에서 쫓겨나 더 멀리 동쪽러시아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요제프는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억류되었고, 아무것도 모른 채 칼 바람이 부는 시베리아로 향하는 기차에 실려갔습니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요제프의 생명을 구한 일이 되었습니다. 만일 가족들의 희망대로 폴란드로 돌아갔더라면 아우슈비츠에서 삶을 마감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1943년 요제프는 사마르칸트, 테헤란, 카라치를 경유하여, 하이파 근처의 추방당한 어린이들을 위한 수용소에 도착했습니다. 벨겐-벨젠 같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그 또래의 생존자들은 청소년들인데도 마치 노인처럼 보였습니다.
2년 후 전쟁이 끝났지만, 요제프는 여전히 모든 의미에서 피난민이었습니다. 부모도 없이 정처 없이 떠돌던 요제프의 머리 속은 온갖 생각과 꿈이 부딪히면서 복잡하기만 했습니다. 모국어가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제대로 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제프는 유대인 학살로 독일인들에 대한 증오가 마음을 차고 넘치고, 강제 수용소 생존자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엄격히 막던 영국에 대한 증오심이 더욱 커져서 아주 힘겨워했습니다.
다른 유대인들처럼 양이 도살장에 끌려가듯이 죽지는 않을 거라고, 최소한 제대로 된 싸움을 할 거라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난폭한 야수의 세계를 살고 있는데 그들처럼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년 뒤 요제프는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유대인 지하 민병 조직인 하가나에 들어갔습니다. 요제프는 유대인들이 차지하기 원하는 지역에 이미 살고있는 아랍계 민간인들을 몰아내고 심문과 폭행, 심지어는 살인을 자행하는 부대에서 근무했습니다. 요제프는 더이상 희생자가 아니었지만, 힘을 가진 자의 편에서도 평화를 얻지도 못했습니다. 사실 그 반대로 고통스러웠던 옛 경험이 다시 떠올랐고, 결국은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는 엄청난 죄의식에 압도가 되었습니다. 결국 군대를 떠났지만, 여전히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유대교를 버렸고, 종교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악을 합리화시키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나는 높은 곳에 있는 능력을 믿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온갖 일을 겪고 다 듣고 난 뒤에 내 조상들이 유일신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렇게 엄청난 고난을 자처했다는 것에 분개했습니다.
신은 없어, 라고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고, 우리와 함께 세상의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고, 부활해서 생명을 가지고 온 그리스도는 분명히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일, 특히 유대인에게 그리고 기독교인 사이에 벌어진 일을 보고 살아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건 미친 짓 같았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공포로 진저리 쳤습니다. 내 마음 속에 그 이름은 종교재판, 박해, 위선, 우상 숭배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 뒤 몇 년 동안 요제프는 인간의 존재 목적, 그리고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를 찾는 탐색을 쉬지않고 이어갔습니다. 자본주의는 그에게 혐오스러운 것이었고, 유대 민족주의인 시오니즘 역시 빛 바랜 것일 뿐이었습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잠시 관심을 가지기도 했고, 장-폴 사르트르의 글도 읽었습니다. 몇 개월 동안은 파리에 있는 이상주의적 맑스주의자들과 함께 공동체로 살아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마음 속 깊이 파고 들어오는 질문들에 진정한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왜 인간 존재는 조화롭게 함께 살지 못할까,라는 질문이 수그러들지 않고 강렬하게 타올라 끝내 요제프는 절망에 빠지게 됐습니다. 그리고 자살의 유혹이 몇 번이나 찾아왔습니다.
한편 요제프는 뮌헨에서 몇 달을 보내면서 우연히 신나치주의자들의 행진을 보고 ‘지도자’를 향한 칭송이 여전히 건재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요제프는 에스페란토어에 빠졌는데, 이 고안된 언어를 옹호한 전후 지식인들은 보편적 언어가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1958년에 요제프는 브루더호프를 만납니다. 이 기독교 공동체에서 요제프는 자기신이 부인했던 조상의 하나님으로부터 전에 없던 도전을 받게 됩니다. 확고한 무신론자였고, 공동체는 실제로 가능하지 않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이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렸습니다. 그러면서 논쟁과 자기방어는 점점 녹아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2년 뒤, 요제프는 믿음의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삶을 헌신했습니다. 세례 직후 요제프는 이렇게 썼습니다.
돌아보면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았으니까요! 그분은 한번도 나를 내치지 않으셨고 나를 포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나를 위해 고통 받았고 계속해서 그의 사랑의 손으로 나를 붙드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언젠가 이해할 수 있게요. 어쩌면 그렇게 눈이 멀어서 그분을 알아 보지 못했었는지 저는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 같이 끔찍한 존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엄청난데도 말입니다.
숱한 갈등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때때로 완전히 바닥을 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만 같을 때도 있었습니다. 내 자신의 무력함을 너무나 크게 느낄 때, 인간적으로 희망이 없어 보일 때, 그리스도는 아주 강력하게 내 옆에 계셨고, 나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되지 않는 삶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이끄시도록 계속 자신을 내어드려야만 합니다. 그분만을 바라보고, 내 자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종종 아주 연약하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를 실망시키기 않으십니다.
세례를 감사와 기쁨으로, 그리고 부끄러움으로 받았다고 말씀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밀쳐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사랑은 우리 인간의 이해를 초월합니다. 이천 년 전에 살았던 예수가, 성경이 말하는 예수가 지금도 그렇게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엄청난 기쁨이었습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묘사하는 모든 말들이 사실이지만, 그분은 그것보다 훨씬 더 위대합니다….
요제프는 “그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진짜 예수”를 발견함으로써 사랑과 일치의 삶이라는 약속을 깨닫게 됐다고 덧붙였습니다.
내 마음에 예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얼마나 여러번 내가 너희를 모으기 원했느냐, 그러나 너는 원하지 않았다!’ 요제프는 이 말씀의 능력을 체험했고, 그것이 모든 장벽-국적과 인종, 종교를 넘어서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너무나도 강력한 이 경험은 제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습니다. 증오의 치유와 죄의 용서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수십 년 후 요제프는 한 남자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의 아버지는 요제프가 군인으로서 어떤 마을 사람들을 몰아내는 일을 도왔을 때 그 마을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요제프의 이야기를 읽고서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1997년 요제프는 두려운 마음으로, 그리고 화해를 향한 열렬한 희망으로 이스라엘로 향해서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서로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 일은 파란만장한 긴 인생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일뿐이었지만, 68세의 나이에 그런 여행을 떠난 것은 요제프의 마음이 어땠는지 잘 보여줍니다. 요제프는 절대 쉬거나 ‘도착했다’고 안심하지 않고 영원한 탐색을 계속 이어갔고, 또한 다른 사람을 같은 길로 이끌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언제나 사랑하는 아내 룻이 있었습니다. 50년 동안 함께 해온 두 사람은 일곱 자녀와 스무 명이 넘는 손주를 두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요제프는 자기 자녀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아버지였습니다. 그의 지혜로운 조언과 겸손은 그를 뉴욕 주와 유럽, 중동 등에 사는 친구와 그를 아는 사람들의 신뢰를 받는 멘토와 상담자, 경청자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는 베들레험으로 자원봉사를 하는 두 미국 청년을 돕기도 했습니다.)
작년 7월 자신의 83번째 생일 날 요제프는 예수를 따르는 한 사람이며 브루더호프의 멤버로서의 자신의 삶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이제 50년이 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분투를 겪었는데 아직도 저는 이곳에 있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떠나겠지요. 그때가 오면 요제프가 신실했다고 말하지 마세요. 반대였으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분이 나를 붙드셨다는 걸 오늘 강조하고 싶습니다. 정말이지 그럴 생각이 없었어요. 꿈에서조차 기독교 공동체에 정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하나님이 이끄셨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신 사랑하는 형제자매와 나를 이끄셨고, 우리는 함께 합니다. 우리같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매일 분투하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나 서로를 지지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도와 나가시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제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입니다. 그런 놀라운 일을 해내셨으니까요. 저 자신은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위대합니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계속 증언했으면 좋겠습니다.
요제프가 죽고 나서 그의 주머니 안에서 쪽지 한 장이 발견됐습니다. 쪽지에는 5세기 유대의 기도문이 히브리어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 기도문을 요제프는 가는 곳마다 지니고 다녔습니다.
나 지금 여기에 용서하네
내게 화내고 조롱한 사람을
강제로, 악의로, 아니면 무지에서
나의 재산, 소유 또는 명예를 해친 사람을
말이나 행동으로 내게 죄 지은 사람 모두를
용서하네.
나 때문에 징벌의 고통을 받는 이가
생겨서는 안 되나니.
요제프가 젊은 시절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그런 기도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기 바라는 그의 열망은, 한때 자신을 벼랑끝으로 몰았던 그 열망은 우리 앞에 놓인 길에 깊은 개인적 안내와 도전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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