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가 쓴 «두려움 너머로»에서 더 읽으실 수 있습니다.
80 대 후반의 나이에도 나의 장인 한스는 유럽으로 여행을 가셨다. 역사와 종교에 큰 관심을 갖으셨던 장인은 나이 때문에 컨퍼런스나 여행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관심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라면 장거리 여행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리 장시간 여행을 해도 장인은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더 힘이 솟는 듯했다. 그걸 아는 가족 중의 한 사람은 장인이 일하다가 돌아가실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1992년 성탄절 전 날, 아흔 살의 장인은 어깨에 양치기 외투를 걸치고 손에 나무 막대기를 쥔 채 건초 더미에 앉아 해마다 야외에서 하는 예수 탄생극에 참여하고 있었다. 장인은 전에도 여러 번 그 연극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연극 중 몸에 한기를 느낀 장인은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한 형제가 장인을 차에 태우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집으로 가서 장인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부축하려고 차 뒷문을 열었다. 그런데 장인은 이미 영원히 눈을 감은 뒤였다.
친구나 가족을 느닷없이 보내는 것은 언제나 큰 충격이다. 하지만 이미 죽음을 생각할 나이가 되었고, 충만한 삶을 살아왔다면 그런 죽음은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할 수만 있다면 장인처럼 순식간에 그리고 행복하게 최후를 맞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언제나 서서히 찾아온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누군가가 이 아름다운 책을 제게 주었더라면…”-매들렌 렝글, «시간의 주름»(문학과 지성사)의 저자
죽음은 언제나 힘겨운 싸움을 동반한다. 거기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두려움도 있고, 남겨진 책임을 다하고 싶은 초조, 과거 잘못이나 죄에서 벗어나고 싶은 후회 등이 있다. 거기에는 또한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는 생각에 대한 본능적인 저항도 있다. 그것을 생존 본능이라고 부르든, 삶에 의지라 이름 붙이든 간에 뿌리깊은 인간의 원초적인 힘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기에 그 힘이 죽어 가는 사람에게 놀라운 쾌활성을 불어넣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