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고 말로만 외치면서 축하하는 부활절 기념은 너무 미흡합니다. 우리 역시 살아났다고 또 하늘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은 게 있다고 말하지 못하면서 부활 자체만 선포하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반복적으로 선포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을 섬뜩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부활의 효력이 없습니다.
아무런 감동도 없으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계속 언급하는 유혹이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생겨났습니다. 마치 신문을 읽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지루하게 앉아서 듣고 있을 뿐입니다. 실은 신문이 더 흥미롭다고 느낄 겁니다. 이에 원수는 이득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이 원수를 물리치고 싶다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찾기 위해 기도로 싸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질문을 가지고 엄청난 논쟁을 벌이지만, 신은 항상 죽어 있습니다. 신이 죽었다면 그들에게는 아주 잘된 일일 겁니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했는데 딱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행복한 삶을 얻기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게 전부입니다. 저는 이 세상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 때까지 단 일 분의 값싼 행복도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주님을 죽인 일을 통곡해야 합니다. 문제를 위해 태어났고, 투쟁하기 위해 태어난 우리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바늘구멍만큼 여기면서 인생은 항상 멋지고 순탄하기를 바라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미래는 우리가 기다려야만 하는 절대적으로 동떨어진 한 지점이 아니라 다가오고 있는 사건입니다. 아마 우리 대부분은 이것에 대한 의식이 없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이렇게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의 미래는 현재이며, 현재가 아니라면 아무 뜻도 아닙니다.
죽음과 죽음의 한 가운데 있는 현생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기꺼이 견디는 열의와 기쁨과 감사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럴 때 부활의 능력은 우리에게 더 가깝고, 그리스도는 참으로 부활하신 분이 되시며, 새 생명이 우리존재 속으로 찾아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태껏 추구해오던 종류의 생명이 아닙니다. 남들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든지, 조금 덜 훔치거나 단정하게 차려 입고 품위 있게 걷거나, 범죄자의 모자를 그럴싸한 모자로 교체 하는 걸 새 삶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이런 것을 새로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말도 안됩니다.
이전보다 더 나아지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새 생명이란 당신에게서 나타나는 생명의 힘이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것이자 거룩한 것으로 당신 안에서 자라날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죄악의 욕망은 더 이상 능력이 없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 성령을 통한 능력이 우리를 온전하고 흠 없는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분명히 기독교 교리나 제도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을 위한 신성한 생명의 계시이며, 마음 생각 감정 가능성의 새 탄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려고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정복하시기 위해 우리 중의 한 사람처럼 되셔서 우리 속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완전히 새로운 삶과 새로운 질서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완전히 다른 남자와 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종종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보여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말문조차 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새 생명은 결코 이 세상의 일시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들어 오거나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으로 계속 되돌아 가야합니다. 더 깊고 더 철저히, 더 충분하게 완전한 새로운 출발을 계속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구주를 위하여 새로운 기초를 놓기까지 이 일을 지속해야 합니다. 그분의 죽음 같은 죽음으로 우리가 주님과의 연합에 이른다면 그분의 부활 같은 부활에도 반드시 연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삶에 들어갑니다. 부활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거듭하여 새롭게 살아나십니다.
부활은 과거 한때에 일어난 단독적 사건이거나 우연히 믿고 있는 교리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본질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만으로는 유익이 별로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믿긴 하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습니다. 이런 믿음은 당신과 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경험하지 않는 한 아무 도움이 못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하는데 그건 최악이 아닙니다. 적어도 그 사람들은 아직까지 경솔하게 그것을 입밖에 내기에는 부활이 너무도 거대하고 엄청난 일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실로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믿노라 주장은 하지만 실제로는 별 의미가 없을뿐더러 부활이 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의 어떤 특정한 부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 엄두도 못 내는 전혀 다른 장소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다른 질서에 있음을 발견하는 그때 우리가 새롭게 되는 것이 현실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듭하여 새롭게 살아나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뜻이 하늘에 계신 것처럼 이 땅을 위한 하나님의 뜻도 계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분의 실재를 전혀 모를 겁니다. 뭔가가 변화되리라는 상상도 전혀 할 수 없을 겁니다.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인간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그분의 부활의 능력은 우리가 닿아 접근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새로운 가능성들이 있음을 깨닫고, 이것을 몸과 영으로 많이 감지할수록 더 요청할 수 있으며, 이 지상에서 더 높고 큰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아무 제한이 없습니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일상생활에 속한 모든 영역에, 일하고 만지는 모든 것에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은 인간의 상황에 들어 올 준비가 되어 있으며 능히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어둠과 악과 불완전성에 주목하지 말고, 이런 저런 문제들이 어떻게 결론 내려질지 파악해 내려고 애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일은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넘쳐 날 때까지, 위로부터 오는 놀라운 능력이 우리의 모든 일에 작용할 때까지 예수님의 부활만을 더욱 더 구하는 게 우리의 일입니다.
출처: Bread and Wine: Readings for Lent and E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