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8월 25일 설교 중에서:
얼마 전에 읽은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산 속 동굴에서 수 년 동안 지내며 명상을 하던 자라투스트라는 그 고독한 장소를 떠나 사람들에게 돌아가려고 산을 내려가던 중 한 늙은 은둔자를 만납니다. 그 은둔자는 사람들에게 가지 말라고 경고하며 무엇 때문에 세상으로 내려가려는지 자라투스트라에게 묻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자라투스트라는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은둔자가 말합니다. “사람들을 사랑해서 내 인생이 이렇게 망가졌다네. 그래서 이렇게 세상과 떨어져 살고 있지. 나는 이제 사람이 아니라, 신을 사랑한다네.” 이 말을 하고 두 사람은 서로 헤어졌습니다. 혼자 남아 그 은둔자와 했던 대화를 떠올리던 자라투스트라는 놀란 듯이 중얼거립니다. “아직도 신을 믿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이 착한 노인네는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이것을 읽고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의 말 속에 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죽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하나님’이란 말을 꺼내도 마음이 들뜨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말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만약 들판에 토끼가 뛰어 다니면 “야! 토끼다!”라고 소리 지르며 모두들 관심을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합니다. 신은 죽은 것입니다.
또 다른 면에서도 하나님은 죽었습니다. 현대 문명은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기차에 타고 있을 때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기관사는 알아서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 줄 것입니다. 기차가 달리는 동안 차장은 이런 저런 일로 불평하고 안달할 수도 있고, 화부(火夫)는 등골이 빠지도록 석탄을 퍼 넣을 것이고, 정비 기술자는 노심초사 기계를 점검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에 우리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우린 그저 좌석에 앉아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현대 문명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모든 이기들을 누리면서 그토록 버릇없고 몰인정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과학 기술은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이도 대단한 성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쳐다볼 것이다.”(요 19:37)라는 성구가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죽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니체는 하나님에 대해 별 생각 없는 지루한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깊은 진리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종교를 가진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종교가 하나님보다 훨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문제들에 대해선 열띤 토론을 할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죽은 채로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죽은 게 그들에게는 더 잘 된 일입니다. 그래야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사람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때마다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삽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결코 죽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모든 것은 혼돈일 뿐입니다. 그저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상실하는 영적인 단절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혼돈 그 자체인 것입니다. 원래 우리 인간은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 건설이라는 목적을 위해 함께 동역해야 할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걸 계속 거부해 왔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은 광기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히 지속되었을 그 혼돈 속으로 예수님이 오셨고 적은 무리가 그를 따랐습니다. 이 적은 무리들은 자신만의 구원과 이익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그런 종교인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목숨을 내놓는 사람입니다(마 10:38). 이들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나며, 하나님과 이 땅을 위해 싸웁니다. 교회는 그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는 현재 조직을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니체는 말했습니다. 그의 지적은 옳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우리는 이 세상이건 저 세상이건 안락한 삶을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뿐입니다. 나는 온 세상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알기까지 단 일 분도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엎드려 지금까지 그분을 죽게 만든 죄를 통회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위해 태어났으며, 싸움을 위해 태어났습니다. 부분적으로만 하나님과 관계하며 편하고 안락한 삶을 살기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의 일을 함께하자!”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은 믿습니까? 믿는 것과 삶 속에서 몸으로 살아내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 진지한 마음으로 안락한 삶을 떨치고 일어섭시다. 목숨을 잃을 지라도 싸움 한복판으로 전진합시다!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은 승리자이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행동하며 기다리는 하나님나라》(대장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