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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ckout자본주의는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과 화해할 수 없다. 신약성서 번역가인 데이빗 벤틀리 하트의 주장이다. 그리스도는 부자들의 탐욕뿐만 아니라 그들의 재산까지 신랄히 탓하셨다. 예수의 첫 추종자들은 자발적인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기술로 무장한 시장의 힘이 우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정한 기독교 경제는 여전히 가능할까? 자본주의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I: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상거래는 본질적으로 악마적이다. 상거래는 빌린 것을 되갚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건다. 내가 내준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갚아라.” - 보들레르, <벌거벗은 내 마음>
나는 보들레르가 도발한 질문에 아주 만족스럽게 해 줄 답이 없다. 하지만, 좀 더 시간을 내어 이 말의 뜻을 밝힌다면 답변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 분명해지리라 본다. 오늘날, 특히 미국에서 자본주의라는 단어는 원시적이거나 초보적인 단계를 가리지 않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경제교류를 지칭하며 터무니없이 방대하게 쓰인다. 불과 몇 세기 전에 본격적으로 움튼 시장 경제는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었기에 보다 정확한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많은 역사가들이 정의하듯이 산업화 시대에 형성되어 점차 이전 시대의 상업주의를 대체한 금융 관습이다. 1861년 프랑스의 사회주의자요 무정부주의자 프루동이 정의했듯이 자본주의는 실제 이윤을 창출하는 사람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하지도, 노동의 결실을 누리지도 못하게 하는 체제이다.
이러한 형태의 상거래는 자유 숙련공들의 계약권을 크게 파괴하고 장인 조합을 소멸시키면서, 노동력을 협상 가능한 상품으로 격하시키는 임금 제도를 대규모 도입했다. 이런 식으로 절박한 이들이 제공하는 값싼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또한 18세기 중반 영국의 인클로저 현상(토지 소유가 집중되면서 농민의 임금 노동자화를 촉진시킴-역주) 같은 정부 정책이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을 임금 노예제나 극심한 빈궁에 몰며 선택권을 점차 제한해 나갔다. 그 결과 경제적 실권이 독립 노동력과 부속 사유지, 소규모 지역 시장을 통해 생산된 상품을 제공해왔던 상인 계층에 상품을 생산, 판매하는 자본 투자자로 이동했다. 그 결과 완전한 기업 체제가 현실화되면서 근대 초기의 합동 출자 회사들이 금융투기를 통해 호황을 누리며 거대한 자본을 창출하는 엔진으로 변화했다. 즉, 땀 흘리지 않는 사람들이 부를 창출하고 즐기는 순전한 자본 시장, 기회의 게임을 하듯이 투자와 매각을 반복하는 경제를 창출한 것이다. 그들은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서 게임을 즐기듯이 끊임없이 투자와 분배의 순환에 관여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기업이 성공과 실패의 결과에 상관없이 걱정 없이 사업할 수 있도록 제한된 책임만 지고 무한의 이윤을 누릴 수 있는 대기업 제도의 발흥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생계수단을 파괴했는데도 마치 새로운 것을 창출한 양 똑같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기업 활동은 음흉하기 짝이 없다. 이들은 법 이전에 법인의 지위를 누리며 정말 비열한 행동을 저지른다(예전에 이런 법적 권한은 대학이나 수도원 같은 ’법인’ 단체들에게만 주어졌다).
자본주의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특히 미국에서 1919년 다지 대 포드 자동차 판결이 내려진 이후) 이런 기업들은 주주들을 위해 최대의 이익만을 추구하도록 요구 받는다. 다른 건 고려하도록 허락되지 않는다. 가령 무엇이 옳고 그른 이익인지 따질 필요가 없고, 노동자들의 복지나 이윤보다 앞서는 공익은 아무런 고려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기업은 비도덕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시스템 전체가 사적 자본의 엄청난 집중과 제약 없이 돈을 처분할 수 있는 재량에 의존한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또한 물건이나 인적 자원을 전례 없는 규모로 악용할 수 있게 허용한다. 이 제도는 단순한 자연적 필요나 심지어는 자연적 욕구를 넘어 사치성 소비 풍조를 조장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소비주의 문화로 귀착된다. 자본주의 문화는 그저 자연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기에, 요한일서가 일컬은 ‘눈의 정욕’에 끊임없이 호소하며 새로운 욕망을 충족하려 발버둥을 쳐야만 한다.
그래도 최소한 인정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가 ‘작동’한다는 점이다. 즉, 엄청난 부를 생성하면서 문화와 물질 환경의 갑작스러운 변화에도 유연하게 적응하며 문제가 생길 때마다 반복되는 실수를 막기 위한 새로운 메커니즘을 발전시켜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의 정당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자본주의 사회는 극빈자층의 존재를 노동 가치의 비축물로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신용 경제의 축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현상을 용인하고 부추긴다. 신용 경제는 빈곤한 이들에게 약탈적인 대출과 이자 관행을 통해 마르지 않는 샘 같이 끊임없이 생성되는 채무자들을 공급하며 채권을 자본으로 전환한다. 투자 기관들은 그들을 믿고 맡기는 투자층을 위해 서민과 노동자층의 지속적인 파산을 무한한 이익의 원천으로 이용한다.
사람들은 때때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얻어진 엄청난 수익이 많은 사람의 이익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마지못해 인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낙수 효과를 증명해 줄 실제 사례는 없고, 현실은 보통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창조하고 풍요롭게도 하지만, 파멸하고 빈곤케 하기도 하며, 필요에 따라 자유와 형평성을 장려하거나 반대로 폭정과 부정을 부추기기도 한다.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진보적 자유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믿음이 없다. 도덕성도 전혀 없다. 이 제도는 남용되기 보다는 효율성의 높낮이를 조절하며 작동된다. 선과 악의 구별을 넘는 지적인 도덕 관점에서 본다 해도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는 악이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인해 나는 우리가 자본주의 다음 단계를 논하기 보다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묻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내 관점으로는 자본주의 다음에 자연스럽게 따라올 단계는 없다. 내가 이 부르주아적 기업주의 시장 국가의 승리가, 멈출 수 없는 유물변증법의 합리적 최종 결과에 따른, ‘역사의 종말’ 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다. 나는 자본주의 논리가 이미 미래를 쟁취했으며 그 지배가 영원무궁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장기적으로 볼 때 지속할 수 없는 시스템이 바로 자본주의이다.
오히려 나의 이런 신념은 무한한 욕구와 유한한 자원 사이의 불균형을 보여주는 아주 단순한 미적분에 기초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기괴하게 전이된 정신질환 같은 것이다. 결국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자연 질서 안에서 힘을 잃고 황폐화 되어서 파괴와 오염, 모독에 의해 사막으로 변할 것이다. 지구는 이미 탄소 배출의 두꺼운 장막에 싸여 중금속과 독소의 홍수에 시달리며 미세 플라스틱 입자의 대기에 잠겨 있다. 그리고 나는 생존 본능도, 건전한 윤리적 결과도, 자연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나 영광스런 창조 세계에 대한 자발적인 숭배 같은 그 어떤 반격도 필연적인 자본주의의 종말을 향한 전진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란 자체의 물적 토대를 영구적으로 파괴함으로써 휘발성의 물질 이익을 확보하는 과정이다. 즉 완전한 소비 체제인 것이다. 하지만 그건 상업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한 지극히 추상적 허무주의에 기반한 소비 체제인 것이다. 이 허무주의는 실제 존재하는 물질의 풍부함을 비물질적인 절대가치로 바꾸려고 전력을 쏟는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삐딱하게 서서 우발적이고 반사적인 힘의 출현을 가로막고 있기에 세상을 고갈시키기 전까지는 자본주의가 지닌 에너지가 고갈될 일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자본주의의 최종 승리일 수도 있겠다. 본질적으로 선한 잔여물들의 마지막 안간힘을 짜내서 피타고라스적 영원 불변함을 지닌 시장의 가치로 넘기려 드는 그런 승리 말이다. 그러니 이 과정을 방해할 수 있는 힘은 자본주의 너머에서 나와야 한다.
II: 자본주의를 넘어서
“우리 유대인들에게는 미래를 탐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의 미래가 늘 공허하고 동일한 시간이라는 건 아닙니다. 매초마다 메시아가 들어오실 수 있는 좁은 문이 열려 있습니다.” -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지평선 너머를 상상하는 건 솔직히 어렵지 않다. 다소 차이는 있더라도 건전한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갈망하는 것이 비슷할 것이다. 역사의 안식, 행복한 무정부주의, 순수한 공산주의, 넘치는 풍요 덕에 소유욕이 제약받지 않는 인간 세상, 기쁨과 편의를 주는 것들이 천지이고, 모든 것이 이성적 사랑에 기초한 공동체에 의해 공유되는 초월적인 세상 같은 곳 말이다. 심지어 공급자 측면의 경제학을 믿는 완벽하게 순진한 신자유주의자도 그 내면에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경험과 인식을 초월한 심오한 무정부적 공산주의자가 꿈틀거리고 있다. 그의 내면 깊은 어딘가에 표트르 크로토프킨이 잠자면서 탐욕과 폭력이 제거된 세상을 꿈꾼다. 모든 사람은 지상낙원이었던 에덴이 회복할 수 없는 시작이 아니라 우리 이야기의 끝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에덴은 역사의 변증법적 문제가 아니며, 유한성이라는 명백한 모순에서 작동하는 초자연적 합리성의 최종 산물도 아니다. 저기 ‘너머’에 있는 곳이다. 에덴은 오직 현재에 대한 종말론적 심판으로, 우리가 끊임없이 배신해온 선한 창조 질서의 추억으로 존재한다. 원칙적으로 저주로만 기억되며 지속가능한 희망은 부수적일 뿐이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이 심판을 모든 것이 다 파멸되기 전에 자본의 질주를 멈출 만큼 강력한 역사의 힘으로 전환할 것인지는 현대 사회의 모든 정치적 사상이 풀어야 할 큰 과제이다.
더군다나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물론 교회의 사회 제도적 역사에서 매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질문을 예리하게 물어 왔다는 데서 작은 희망을 얻는다. 하지만 그들이 자기 신앙의 함의를 얼마만큼 인지하는가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종말론적 심판이 역사에서 이미 존재했고, 특정한 물질적 사회적 정치적 형태로 표현되어 왔다는 것을 인정할 의무가 있다. 여러 면에서 요한복음서는 세상의 온갖 구조적 죄악에 대한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종말론이 거의 완벽하게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역사를 관통하며 모든 것을 밝히시는 빛이며 그 빛을 알아보는 일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 빛을 본 것은 아버지를 본 것이고, 따라서 그를 거부하는 것은 악마를 아버지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은 면면히 드러나게 되고 내면 깊이 내린 결심들이 공개되며 우리가 만든 우리가 누구인지 드러난다.
요한복음만이 아니다. 마태복음 25장 역시 마지막 때의 비유를 들고 있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아버지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이 하늘에서 오신 분임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지금 여기서 저주를 받는다고 기록한다. 마태복음은 비참하고 억압받는 사람들, 고통 받고 박탈당한 이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얼굴, 즉 하나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지옥을 자신의 집으로 선택했다는 증거라고 밝힌다. 바울의 말대로 우리가 한 모든 일들은 불에 의해 증명될 것이며, 그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오직 ‘ 불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신약성서는 유일하게 심판대에서 완전히 불타지 않고 통과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실천이 있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어떤 형태이든 상관없이 자본주의는 인간 모두가 공통적으로 물려받은 창조물을 최대한 남용함으로써 최대한 많은 사적인 부를 생산하는 제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부에 대한 옳지 못한 집착뿐만 아니라 부를 얻고 유지하는 것 자체를 비난하셨다. 이는 세 개의 공관복음서 모두에서 발견되는데 부자 청년의 이야기와 낙타와 바늘귀에 관한 비유가 좋은 예이다.
이는 복음서 어디를 봐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예언자들을 인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으셨다(눅 4:18). 부유한 사람들에게 그가 전하는 소식은 확실히 암울하다. “너희 부요한 사람들에게는 불행이 닥칠 것이다. 너희는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위로를 이미 다 받았다. 지금 배부르게 먹고 지내는 자들아, 불행하게도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지금 웃는 자들아, 불행하게도 너희는 슬퍼하며 울 것이다”(눅 6:24–25). 아브라함이 지옥에 있는 부자에게 말했듯이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그래서 지금 너는 고통을 받는다”(눅 16:25).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도와줄 것을 요구하실 뿐만 아니라(마 5:42), 한 손이 아낌없이 퍼준 일을 다른 손이 몰라야 한다고 하셨다(마 6:3). 단순히 물질에 너무 집착해 모으는 것뿐만 아니라 이 땅의 부를 쌓아 두는 것을 단호히 금지하시며, 대신 천국의 보물을 쌓는 것만 허락하셨다(마 6:19-20). 그는 자기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라 하시며(눅 12:33) “자신의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눅 14:33). 마리아가 고백한 복음서의 구원 약속에는 주님께서는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으로 배불리 먹이셨으나 부자들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다”라고 나온다(눅 1:53). 야고보의 말은 정말 주목할 만하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약 5:1–6)
간단히 말해서 초대교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는 사도행전이 기록한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서신에 나타나 있다. 이는 역사의 우연이 아니라 신앙의 명령으로 이루어졌다. 사실 나는 최근 새로운 신약성서의 번역을 준비하면서 코이노니아(Koinonia)라는 단어와 관련 용어를 공산주의 같은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됐다.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그 단어의 적절성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나의 실수로 초대교인들이 행한 일들을 20세기의 중앙집권적 공산주의 국가와 연관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그 단어가 모든 차원을 담기에는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1세기의 초대교인들 가운데 분명히 실행되었을 도덕, 영, 물질적 차원의 나눔을 전적으로 담고 있다. 그들이 전파한 복음 가운데 절대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개인적 부와 사유재산의 추구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생명의 본질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주장이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초대교부 시대의 위대한 신학자들도 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물론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초대교회가 주창한 정신은 고립된 수도회 운동에서 지속되었고, 이따금 프란치스코 수도회 운동, 러시아정교회의 무소유 운동, 가톨릭 노동자 운동, 브루더호프 등 같이 지역적 ‘복고’(purist) 운동으로 분출되곤 했다.
물론 작은 공동체들이 일정한 기독교 집단주의 형태로 헌신적인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것은 아주 좋다고 본다. 사실 현재 상황에서 그들의 공동생활은 초대교회의 코이노니아가 실질적으로 가능함을 보여주는 유일한 예일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정치 질서로부터 고립된 동시에 의존해 있는 그들의 삶의 방식이 이상적 기독교 정치를 제대로 실현하는 것인 양 오인될 때는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이 공동체들 이 사회에 보내는 예언자적 메시지가 대부분 큰 교회 신자들이 성직을 신성시하는 것처럼 특별한 천직으로 여겨지거나, 일부 극소수만 할 수 있는 대단하고 특별한 것으로 변질될 수 있고, 실용적 정치 모델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그 안에는 큰 위험이 도사린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몸의 코이노니아는 나란히 놓인 그럴듯하고 비슷한 것 들 중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며 개인의 윤리나 선택적 기호에 따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코이노니아는 후퇴가 아니라 혁명에 대한 부르심이며 최후의 심판으로 역사에 다시 또 다시 등장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만물의 주이시며, 당신의 제자들에게 삶의 형태로 물려주신 빛의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했다는 사실과 떼어 놓을 수 없다. 그 나라는 역사의 오랜 진행 과정에서 서서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 침입하듯 다가온 것이다. 이미 심판은 내려졌다. 최후의 말씀도 선포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심판이 임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에게는 초대교회의 코이노니아 이외에 사회 정치 경제적 질서를 꿈꾸거나, 기독교적 사랑의 무정부주의 외의 공동체적 도덕을 갈망할 자유가 없다.
물론 이 진리가 갖고 있는 정치적 의미는 최소한 현실의 실천 면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나는 이 글의 처음에서 ‘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가 쓰는 용어의 뜻을 잘 밝힐 수는 있다. 그래서 어떤 종류의 정치 사회적 현실이 기독교인의 양심에 반감을 일으키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일종의 도덕적 선인 것처럼 가장하며 끊임없이 부채질하는 소비 문화, 수단과 방법, 결과를 가리지 않고 최대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가에게 굴종하는 법률 제도, 잔혹함과 분열, 국가 정체성 편향의 정치, 이것은 ’우리’의 것이고 ‘그들’의 것이 아니라고 가상의 경계선을 긋는 획책 같은 것 말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자선의 수단을 최대한 이용해 공공선을 이루는 비전이다. 사유재산의 불가침 권리를 뒷받침하는 법과 정의가 아니라, 바실리오 대제, 니사의 그레고리, 밀라노의 암브로즈, 요한 크리소스톰과 같은 초대교회 사람들의 가르침을 근원적인 진리로 여겨야 한다. 이 진리는 모든 것은 모든 이에게 똑같이 귀속되어 있으며 굶주린 사람의 빵, 헐벗은 이들의 옷, 가난한 사람의 돈을 취해서 막대한 개인 재산을 축적하는 것을 도둑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진정한 기독교적 정치를 추구할지는(최소한이나마 사회의 모습을 바꾸기를 희망하는 차원에서) 어려운 질문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물질주의적 사고에서 깨어날 때에만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심판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사회보다도 진정한 공산주의적이며 무정부주의적인 사회를 궁극적으로 희망할 자격이 있다. 초대교회는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동시에 두 사회의 특성을 성취했다. 그런 사회를 진정으로 상상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는 것이리라.
데이빗 벤틀리 하트는 철학자, 작가, 번역가, 문화평론가이다. 최근 저서로는 “신약성서: 새로운 번역(The New Testament: A Translation)”, “모두 구 원을 받으리라: 천국과 지옥, 우주적 구원(That All Shall Be Saved: Heaven, Hell, and Universal Salvation, Yale University, 2019)”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