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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men sewing in a sweatshop

    워킹 걸

    노동 착취는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 마리아 헨지펠트

    2019년 12월 10일 화요일

    다른 언어들: Deutsch, español, français, 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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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식 나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성의 파워가 시장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당당한 그녀들’(You-go-girl)이라는 메시지는 신발부터, 바디워시, 자동차 등 모든 물건을 파는데 적극 이용되고 스포츠 시장에서도 제대로 먹힌다. 나이키는 지난 2월 ‘미치도록 꿈꿔라’(Dream Crazier) 광고 캠페인을 선보였는데, 시몬 바일스, 세레나 윌리엄스, 메건 라피노 등 세계적인 여자 운동 선수들이 등장해 매우 감동적인 목소리로 “여자가 마라톤을 하면 미쳤다고 한다. 여자가 복싱을 하면 미쳤다고 한다. 여자가 덩크슛을 하면? 미친거지. NBA팀의 코치를 한다. 제 정신이 아니다. 여자가 히잡을 쓰고 경쟁하고, 기록을 갱신하고, 연속 1080도 회전을 성공하거나 23번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아기를 낳고 복귀한다고? 미쳤군 미쳤어.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나이키가 이런 류의 캠페인에 열을 낸 지 꽤 됐다. 사실 나는 수년 전 나이키의 여권 신장 프로그램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 회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나이키의 자체 자선 기구인 나이키 재단(현재는 나이키 커뮤니티 임팩트 기금)은 우간다, 에티오피아 같은 세계 빈국을 대상으로 한 여권 신장 프로그램을 적극 홍보 중이었다. 이 프로그램 덕분에 나이키는 여성 단체와 관련 단체들 사이에 상당히 인기가 높아졌다. 그런데 이 나이키가 1990년대 중반 당시 해외 공장을 광범위하게 악용하여 페미니스트들과 노동 운동가들에게 공격을 받았던 그 회사란 말인가? 지금도 나이키 운동화와 티셔츠를 만들고 있는 여성들은 어떨가? 이 여성들은 얼마나 자기에게 권한이 있다고 느낄까? 2016년 어느 날, 이런 고민을 가지고 베트남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나이키의 걸파워 이미지와 나이키 광고에서 뽐내던 자유와 여권 신장을 부정하는 현실을 목도했다.

    2016년 1월의 어느 무더운 오후, 나는 하오와 하오의 동료 세 명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하오는 남편, 아이들과 함께 베트남에서 제일 큰 도시인 호치민 시에 인접한 공업 지대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하오가 사는 방 밖에서 통역과 함께 만났다. 우리는 바닥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나이키에 운동화를 공급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에 대해 얘기했다.

    그해 1월 나는 18명의 노동자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이들은 다섯 곳의 각기 다른 나이키 공급업체에서 근무중이었다. 하오의 이야기는 이들이 겪은 전형적인 사례였다. 하오는 긴 근무 시간과 과도한 작업 압박에 시달렸다. 작업이 너무 늦거나 하자가 있으면 일상적으로 굴욕을 당했으며 쥐꼬리만한 월급에 겨우 맞춰 살아가느라 애써야 했다. 월말이 되면 하오는 날아오는 청구서를 처리하느라 종종 돈을 빌려야 했다. 하오는 “빚을 갚으려고 점심 시간에 틈을 내어서 복권을 팔아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저희 사장님에게 들키면, 절 해고할 지도 몰라요.” 하고 덧붙였다. 하오는 다섯 살배기 딸이 있지만, 돌볼 여력이 없어 베트남 북부에 있는 친가에 보냈다.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려와야 했지만, 일정이 빡빡할 때면 업무가 끝나도 퇴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작업장 내 현실은 여권 신장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이들이 보여준 급여 명세서와 공장 규정집을 대조해 보니 불법적 임금 감봉과 지나친 초과 근무가 다반사인 걸로 드러났다. 그들은 가족과 기본적인 삶의 질을 누리는 데 필요한 비용보다 무려 4배 적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초과 근무는 일상적이었고, 자발적인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을 학교에서 데려와야 했지만, 일정이 빡빡할 때면 업무가 끝나도 퇴근이 불가능했다. 얘기를 나누었던 워킹맘 열 한 명 중 여섯 명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최소한 아이 한 명을 다른 곳으로 보냈고, 1년에 겨우 한 두 번 볼 수 있었다. 이들은 가족이 함께 살아보려고 일을 하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가족이 서로 헤어져 지내는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나는 이 연구 결과를 가지고 나이키사에 여성 노동자들의 고충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물었지만, 나이키 측은 전혀 놀라지도 특별히 염려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변화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라며 이들이 하는 일이 그리 중요하거나 보수가 좋은 일도 아니고 나이키의 여권 신장 캠페인 기준에 부합하지는 않지만, 베트남의 의류 산업 내 노동 기준이 점차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답했다.

    나이키는 갭, H&M 등과 같이 노동 기준을 무너뜨리도록 고안된 체제에 동참하는 수 많은 다국적 브랜드 기업 중 하나다. 나이키는 외주 하청 국가로 베트남을 선택했는데, 이는 베트남에서는 독립 노조 결성 및 파업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오나 그의 동료들이 겪고 있는 고충과 무력감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보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억압하도록 고안된 시스템의 계산된 결과물이다.

    나이키, 갭, 자라, H&M과 같은 다국적 기업들은 저렴한 생산비에 우선을 둠으로써, 노동권 보호가 가장 취약한 나라와 거래를 하고 하오와 그의 동료들이 말해준 강압적이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앗아가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미국 내 의류산업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노동 여건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그래서 노조와 파업은 필수적이다. 가장 유명하고 효과적인 파업으로 우크라이나 출신의 이민 노동자 클라라 레믈릭이 주도했던 1909년 뉴욕의 ‘2만인의 시위’를 꼽을 수 있다.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던 수만명의 노동자들은(이들의 대부분은 10대 소녀들이었다) 더 이상 가혹한 노동을 참을 수 없었다. 월급은 주급 4달러 수준인데 근무시간은 주 65시간을 초과했고, 공장은 위험하고 지저분할 뿐 아니라 성희롱이 일상이었다. 레믈릭과 같은 노조 조직위원에게 수익의 정당한 몫을 요구하고 공장 여건을 개선하도록 공장 사장들을 압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노동자로서 공장문을 닫도록 그들의 결집된 힘을 이용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거의 석 달 동안 2만에서 3만 명의 의류 노동자들은 차디찬 뉴욕의 겨울을 헤치고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며 로어 맨해튼 거리를 걸었다. 여성운동가이자 노동 역사학자인 아넬리스 올렉(Annelise Orleck)은 자신의 저서 “상식과 화재(Common Sense and a Little Fire)”에서 공장주들이 뉴욕 경찰을 등에 엎고 파업 노동자들에게 잔인하고 폭력적인 모든 조치를 취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파업 기간 동안에만 700명의 여성들이 체포됐고, 뉴욕시 공무원들은 되려 노동자들을 제멋대로 굴고, 부도덕하며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로 묘사했다. 레믈릭도 17번이나 체포되었고 6번이나 갈비뼈가 부러졌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은 노조, 부유층의 지원, 동정 어린 언론에 힘입어 끈질기게 투쟁했다. 그래서 마침내 남성 노조 지도부의 예상과는 달리 파업을 통해 많은 목표를 이루었다. 이 운동으로 노조는 정식 승인을 받았고, 주 52시간 근무 및 임금 인상도 달성했다. 파업의 성공으로 의류 산업 내 단체행동은 가능한 일이자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고, 다른 도시에서도 의류 공장 파업의 물결이 일었다.

    파업의 성공으로 의류 산업 내 공장 근로 여건이 크게 나아지긴 했지만, 비극적인 실패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맥스 블랭크와 아이작 해리스 등 트라이앵글 블라우스 공장의 몇몇 사장은 안전상의 위험을 초래하는 요인들을 개선하라는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2만인의 시위가 끝난 지 1년이 지난 1911년 3월 25일, 공장 건물 8층에 화재가 났고, 146명의 트라이앵글 공장 노동자들이(이들 대부분이 당시 파업에 참여했던 노동자였다) 불타거나 공장에서 뛰어내리다가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트라이앵글 화재 사고로 발생한 죽음과 2만 인의 시위로 촉발된 파업의 물결은 노동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노동 환경을 전국적으로 향상시키는데 기여했다. 아넬리스 올렉이 기술한 바와 같이 레믈릭과 노조 조직위원들은 “1919년까지 전체 여성 의류 공장 노동자들의 절반이 노조에 가입하도록 장려하며 그 폭풍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나중에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이 채택했던 진보적인 노동 법안의 대부분은 당시 화재 사고를 목격하거나 화재로 친구들을 잃었던 여성 노동 운동가들이 만들거나 영감을 준 것이었다. 노동여건이 개선된 것은 불가피하게 발전된 것이 아니라 뉴욕 의류 노동자들의 피와 용기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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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박장성의 의류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2015)
    사진 응우엔 후이 캄(Nguyen Huy Kham), 작가의 허락을 받고 사용

    100 년 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의류제조업체는 여성과 어린 소녀들을 선호한다. 고정관념상 여성들의 민첩한 손가락은 섬세한 조립라인 작업에 적합하다. 더 큰 고정관념은 여성들은 남성보다 더 유순해서 문제를 덜 일으킬 것이라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대만의 어느 공장 인사 담당자는 인류학자인 린다 게일 아리고에게 이렇게 말했다. “젊은 남자 노동자들은 경력상 가치가 없는 단순 작업을 하기에는 분하지도 못하고 참을성도 없습니다. 이들은 불만이 생기면 바로 기계를 부수고 심지어 감독을 위협합니다. 하지만 여자요? 대개 약간 울다 말지요.”

    이런 성차별적인 사고방식이 어떻게 20세기 초 클라라 레믈릭의 투지와 당시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웠던 수 만명의 여성들과 일맥상통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의류 공장 노동자들은 항상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해 왔다. 1909년과 오늘날의 차이점은 100년 전에는 뉴욕의 블라우스 차림의 중상층 목전에서 노동자들이 폭력을 당했던 반면, 지금은 노동자들이 집단행동을 하더라도 이를 엄중 단속하고 탄압하는 일은 소비자들의 시선을 피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전 세계 시장에 하청을 주는 방식은 주문을 하는 서구 브랜드 관리자와 최대한 인건비를 낮추려는 공장 관리자가 사이에 필연적인 간극을 초래한다. 노조를 와해하려는 수고가 티셔츠 옆 솔기와 함께 외주 업체로 넘어가면서 글로벌 브랜드 업체들이 빠져나갈 길은 수도 없이 많아졌다.

    이러한 난관에도 베트남, 방글라데시 등지의 의류 노동자들은 품격 있는 노동과 공정한 임금을 요구하며 길거리로 나섰다. 2008년 베트남에서는 약 2만 여명의 나이키 하청 업체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근무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사측은 집단 행동을 선동했다 하여 최소 7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한 지하 노동단체가 나이키 측에 노동자를 해고한 하청 업체에게 압력을 가해 다시 고용하도록 움직이라고 촉구하자 나이키의 글로벌 기업 사회적 책임 담당 선임 이사인 찰스 브라운은 베트남의 압제 정권 뒤에 숨어 버렸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법적 권리와 고용주의 권리 및 의무 사이의 경계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라고 답하면서 “고용주는 노동자들이 5일 간 출근하지 않으면 파업 중인 노동자를 해고할 권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브라운은 베트남의 노동권이 취약하다는 사실이 유감스럽고 놀랍다는 것처럼 말하지만, 베트남에서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율권을 높일 수단이 부족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이키가 베트남을 선택한 것이다.

    나이키가 공급망 및 외주 하청을 선택해 온 역사를 보면 기업의 세계화 전략 하에 어떻게 ‘바닥으로의 경쟁’이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다. 1970년대 나이키의 첫 외주 하청 대상국은 한국이었다. 군부독재 통치 하에 있던 당시 한국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 기회가 거의 없었다. <미즈 매거진>(Ms.Magazine) 의 바바라 에런라이크와 아네트 푸엔테스의 글이나 루스 피어슨과 다이앤 엘슨이 <페미니스트 리뷰>(Feminist Review)에 기고한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한국의 여성 노동자들은 공장 근처에 있는 콩나물 시루 같은 방에 여럿이 함께 살며 암울한 조건에 처해 있었다. 재봉사였던 민종석 씨는 16시간의 근무 시간, 박봉, 건강 위험 등에 대해 기록한 바 있다. “견습공이 옷에 붙어 있는 실보무라지를 털어 낼 때면 방안 전체가 먼지로 가득해 숨쉬기조차 힘들다. 이렇게 먼지투성이 공기를 마시며 일하다 보니 폐결핵, 기관지염, 눈병 등을 앓는 사람이 늘어만 간다.” 민종석 씨가 보기에는 “한숨과 눈물 속에 우리의 피가 실과 솔기로 녹아 없어진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의 기동대는 “강철 몽둥이와 인분을 가득 채운 양동이로 무장하고는 최소 한차례 이상 한국 노동자들이 단체 행동을 하려는 시도를 무참히 박살냈다. 이들은 여성 노조 사무실에 침입하여 사무 집기를 박살내고 인분을 여성 노동자들의 몸과 머리, 눈, 입에 마구 발라 댔다.” 여성들이 적정한 임금 인상을 확보하고 심지어 군사 정권을 끌어내리는데 성공하자, 이번에는 나이키가 이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신시아 엔로는 “한국 여성 노동자들이 새로이 활동가로서의 자신감을 얻게 되자, 나이키의 하청업체들은 1980~1990년대에 걸쳐 한국의 무수히 많은 공장을 폐쇄하기 시작했다. 군사정권만이 허용해 줄 수 있는 작업장의 통제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이키와 여러 유럽, 미국의 운동화 회사들은 인도네시아, 중국, 태국 등지로 이주해 버렸다.

    노동자들의 집단 행동이나 이를 엄중 탄압하는 데 이용되는 방법은 주로 소비자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다.

    1990년대 초까지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온두라스 등지에 있는 수출 공장의 노동 착취 현장이 들통나면서 마침내 이들 기업들의 외주 하청 모델의 이면이 드러났다. 브랜드 이미지가 실추되고 만 것이다. 소비자들은 노동 착취로 만든 신발이나 옷을 입고 싶어 하지 않았고 외주 하청 모델이 채택한 방임적인 접근법은 비양심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운동 단체, 학생, 소비자들은 글로벌 브랜드 회사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처음에 나이키는 책임을 부정했다. 이들은 왜 기업이 인도네시아 사업 파트너사의 업무 관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냐고 되물으며 나이키는 유엔이 아니라 신발 회사라고 강변했다. 그뿐 아니라 나이키의 대변인은 “월급은 적지만, 일자리가 없는 것보다는 낫죠.”라고 지적하며 이들 여성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뜨거운 땡볕 아래서 코코넛이나 수확하는 것”일 거라고 말했다. 소비자들은 노조 및 노동 운동 전문가들이 비판한 나이키 같은 글로벌 회사들의 취약하고, 비효율적이며, 불투명한 공장 관리 시스템을 시정하도록 압박했지만, “나쁜 일자리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는 주장은 여전히 제품과 이윤만을 창출하는 환경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자주 언급된다.

    나이키만이 이런 방식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2013년 허핑턴 포스트의 한 기자는 방글라데시에 있던 라나 플라자 공장이 붕괴하자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베네통의 CEO인 비아지오 키아롤란자에게 이 사고에 대한 베네통의 역할을 물었다. (이 사고로 1134명의 의류 공장 노동자들이 죽었고, 1911년 트라이앵글 공장 화재처럼 이 사고도 예방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사고는 베네통의 책임이 아니라 하청 업체의 잘못이라고 답했다. 전체 공급망을 별개로 떼어놓고 보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설득력 있는 주장일 수 있다. 하지만 바닥에서 벌어지는 고통과 착취가 최상층의 이윤과 직결되어 있고 외주 하청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결과가 아니라 분배의 문제임을 이해할 때, 이를 정당화하기는 매우 어렵다. 트라이앵글 화재 사고는 예방이 가능했지만 힘의 불균형 관계 때문에 초래됐듯이, 라나 플라자 참사도 서구의 자본을 위해 정부와 기업이 최빈곤 국에서 무자비하게 경쟁하도록 설계된 글로벌 사업 시스템의 결과였다.

    우리가 “나쁜 일자리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는 변명을 허용하게 되면, 구조화된 착취 체제를 급격하게 변화시켜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현대 패션 공급망의 극단적인 힘의 불균형을 자연스럽고 불가피하다고 받아들이는 셈이 된다.

    women sewing in a sweatshop

    저렴한 노동력을 찾는 노력은 현재도 계속 진행 중이다. 현재 여러 유명 브랜드 기업들은 민간 부문 노동 분야에서 법정 최저 임금이 없는 국가들을 찾고 있는데, 그 대표적 국가가 에티오피아이다. 2017년 나는 이곳에서 몇 주를 보내며 에티오피아의 연구 파트너들의 도움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켈빈 클라인과 토미 힐피거 브랜드를 소유한 H&M과 PVH에 의류를 납품하는 네 개 공장의 노동자 40명 이상의 증언을 수집했다.

    “나쁜 일자리라도 없는 것보다 낫다”는 주장은 여전히 제품과 이윤을 창출하는 환경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자주 언급된다.

    에티오피아 내에서 가장 큰 H&M 납품업체의 노동자들은 매월 56시간까지 무보수로 초과 근무를 한다고 했다. 이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한 23세 여성 노동자는 공장 관리자가 근무 시간이 끝나도 자신을 보내주지 않아 자주 야간 학교 수업을 빠졌다고 토로했다. 한번은 이를 물리치고 야간 학교에 가자 관리자는 하루치 급여를 벌금으로 매겼다. 그녀와 동료들의 급여 명세서 기록을 보면 이들은 자신이 일한 초과 근무 수당의 일부만 간신히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인터뷰했던 그 공장 직원들의 초과 시간 평균 시급은 18센트(약 213원)였지만, 이들이 무보수로 일한 초과 근무 시간까지 고려하면 겨우 12센트(약 142원)에 불과 했다. 공장 노동자들은 과도하게 긴 근무시간, 성희롱, 극심한 업무 압박, 너무 덥고 먼지가 많은 작업 환경 등으로 수시로 작업장에서 쓰러지곤 했다. 1909년의 상황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의류 무역이 개선될 유일한 길은 글로벌 브랜드 기업들이 정치 엘리트의 지원을 받아 의도적으로 악화시킨 힘의 불균형 상태에 도전하고 이를 바로잡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것이다.

    나이키 재단의 ‘여권 신장’ 자선 활동에서 역설적인 점은 나이키가 실제 사업을 운영할 때는 진정한 여권 신장 활동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나이키 재단은 여성 인권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자사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똑똑한 사업 투자 정도로 이용한다. 결국 나이키 자체 재단과 홍보실에 투자하는 것이 나이키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을 만큼 임금을 지불하는 것보다 더 저렴하니 말이다.

    이들 기업은 자선 캠페인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을 벌이면서 소비자들이 사고 싶어하는 기업 이미지와 소비자들이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기업 간의 간극을 좁혀 나간다.

    그러나 노조의 활동과 파업, 노동법 집행 등을 통해 집단적인 권한 이양의 움직임이 있었고, 그 결과 1910년부터 1940년까지 미국내 공장 노동 환경이 개선되었다. 오늘날 유명 브랜드 회사들은 독립 노조의 위세가 약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국가로 외주 하청을 하다 보니 더 이상 노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기업들이 두려워하는 부정적인 이미지 노출을 통해서만 기업들이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와 세계 무대에서 우리를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더 이상 못 본 척해서는 안되는 까닭이다. 대신에 우리는 운동화, 티셔츠 등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벌어지는 불필요한 착취와 치명적인 사고를 일으키는 힘의 불균형 상태를 바로잡을 새로운 전략을 찾아야 한다. 이는 유권자이자 소비자인 우리의 힘을 강력한 노동권과 생활임금을 요구하는 새로운 방식의 무역거래를 요구하는데 이용하는 것이다. 파업을 해야 하는지 아닌 지에 대한 토론에 지친 클라라 레믈릭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일하는 여성입니다. 저는 참을 수 없는 여건에 반대하며 파업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하나지요. 저는 막연하게 떠들어대는 발표자들의 얘기를 듣는데 지쳤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파업을 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총파업 선언을 결의하는 안을 제출하는 바입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시간? 미쳤다. 생활임금? 미쳤다. 괴롭힘과 모멸감에서의 자유? 미쳤다. 육아휴직? 미쳤어. 단체 협상권? 미쳤군 미쳤어.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지은이 MariaHengeveld

    작가 마리아 헨지펠트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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