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total: $
Checkout2017년 4월 19일, 미국 뉴욕주 리프톤. “이제, ‘평화로운 안식’의 진정한 의미를 알겠어요.” 나와 동생을 포옹하는 노인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게 평화예요.” 미국 시민권 운동의 영웅이자 ‘기독교 공동체 개발 협회’의 설립자인 존 퍼킨스는 사흘전 세상을 떠난 우리 아버지에게 오래된 친구이자 평화를 위해 일한 동료로서 경의를 표하기 위해 미시시피에서 먼 길을 찾아왔다. 우리는 아버지의 육신 곁에 둘러 앉아 영생이라는 신비를 마주보았다. 평안한 안식은 평생의 수고에 따르는 상급이다.
우리 아버지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는 목사였으며, 브루더호프의 장로였고, 평화와 용서를 통한 화해라는 메시지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었고, 복음대로 살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싸운 전사였다.
조문하러 온 이들을 살펴보며 나는 아버지의 평생을 돌아볼 수 있었다. 어린아이들을 이끌고 찾아온 브루더호프의 가족들, 휠체어를 타고 온 나이드신 분들, 평생 함께 일한 성직자들, 수백 명의 학생들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방문하셨던 이웃들도 왔고, 건설 시공업자와 배관공, 의사와 간호사, 정치인과 남녀 경찰관들, 구조요원들도 찾아왔다. 그중에는 뉴욕 대교구 대주교인 티모시 돌런 추기경도 있었다. 추기경은 힘찬 발걸음으로 다가와 우리를 안아 주었고, 고인을 위해 가슴에서 우러나온 기도를 했다. 주님을 위해 아버지와 함께 했던 일들을 회상했고, 함께 독일 소시지와 맥주를 즐기던 이야기도 했다.
영감과 성령을 따라 살아간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요약할까? 아버지는 나를 가로막으며 “난 성자가 아니야! 날 성자처럼 그리지 말아.”라고 하실 게 뻔하다. 맞다. 지팡이를 짚고 거침없이 다니셨던 아버지는 성자보다는 예언자에 가까웠다. 아버지는 한결같고, 믿음직하며, 단호하셨고, 비바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둥 같은 분이었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하나로 산 사람의 삶은 너무 단순하고 심오해서 단 한 편의 글로 다 설명할 수 없다. 그런 생동하는 삶은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는 전설과 같아서 글로 표현해버리면 생명력이 사라진다. 도무지 그리기 힘든 초상화이고, 나는 사실 화가도 아니다. 다만 나는 상형문자를 새기는 일 정도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출생
1936년에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와 그의 아내 안네마리 헤드비히 베히터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독일에서 영국으로 갔다. 1940년 그곳 영국에서 아버지가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셨다. (내 증조부 에버하르트 아놀드는 1920년 아내 에미 아놀드, 처제 엘제 폰 홀란더와 함께 브루더호프를 설립하셨다.)
얼마 되지 않아 조부모님은 가족을 이끌고 브루더호프 식구들과 함께 영국을 떠나야 하셨다. 독일인들은 적국의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곳곳에 독일 잠수함이 있는 대서양을 배로 건너서 파라과이의 정글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공동체는 농사를 짓고 공예품을 제작하면서 생계를 근근이 이어나갔다. 어린 시절의 험난한 개척자 생활 덕에 아버지는 인내심과 강단을 익히셨다. 무엇보다도 십계명 중 다섯째 계명이 어린시절의 밑거름이 됐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아버지가 이 말씀을 세지 못할 정도로 반복해 말씀하시는 걸 들으면서 자라난 나는 오늘에서야 아버지가 이 계명에 순종하신 일은 아버지가 지금 남기신 유산의 밑거름이었으며, 그것 때문에 하시는 일이 복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미국인이 되다
1955년에 가족이 브루더호프 공동체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특유의 애정어린 미소와 밝은 성격, 사람들을 향한 애정으로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도전을 기꺼이 통과하셨다.
아버지는 뉴욕주 북부에 위치한 킹스턴 고등학교에서 만난 미국을 사랑하셨다. 육상 선수로 뛰었고, 접시 닦기 일을 했으며, 아직은 작은 시골 마을에서 공연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는 않던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도 만났다. 영어 선생님은 아버지의 가슴에 평생 남을 셰익스피어를 향한 사랑을 심어주셔서 그로부터 60년이 지나서도 아버지는 즉석에서 맥베스나 햄릿의 대사들을 읊으셨다.
독일 억양 때문에, 또 학교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거부하셨기 때문에 아버지는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부모님이 히틀러를 피해 망명하는 과정을 지켜본 아버지는 국가 권력에 무비판적으로 충성한 것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지셨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미국인이 되신 걸 대단히 기뻐하셨는데, 바로 양심의 자유가 헌법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아버지는 그 양심의 자유를 실천해서 브루더호프에 당신의 삶을 헌신하셨다.
새로운 길
1965년 초 경영학 학위를 받은 아버지는 브루더호프의 장난감 제조업체인 ‘커뮤니티 플레이씽스’에서 신입 판매사원으로 일하셨다. 그러던 어느날 아틀란타로 출장을 갔다가 오래된 텔레비전 수상기를 켜는 순간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흑인 청년 지미 리 잭슨이 평화로운 투표권 행진에서 총에 맞은 지 8일 만에 사망했다는 속보를 접했다.
아버지는 시민권 운동에 마치 자석처럼 빨려들으셨다. 당신의 아버지는 2차세계대전 당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어섰다. 이제 아버지의 차례가 온 것이었을까? 아버지는 곧바로 320km를 운전하여 셀마에 도착했다. 그때 경험은 아버지의 책 《왜 용서해야 하는가》에 잘 담겨있다.
장의사가 지미가 입은 상처를 가리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머리까지 가리지는 못했다. 약 3,000명의 사람들이 추모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교회를 가득 채웠다. 우리는 창가에 걸터앉았다. 추모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증오나 복수를 다짐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추모식에 참석한 회중에게서 용기가 뿜어져 나왔다. 특히 <누구도 나의 세상을 바꿔주진 않아요>라는 노래를 부를 때는 더욱 그러했다.
장례식에서 마틴 루터 킹은 용서와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들에게 경찰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 살인자들을 용서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호소했다.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우리 승리하리라>를 함께 불렀다.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증오하고 복수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심지어 지미의 부모조차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일은 아버지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그날 아버지가 받은 영감은 그후 마지막 숨을 내쉬실 때까지 평생 이어질 삶과 사명을 빚어냈다. 아버지의 비전은 깊고 넓었으며,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도 경험했듯이, 종종 사람들의 오해를 샀다. 그러나 아버지의 비전은 분파적인 사회 운동으로의 부르심은 아니었다. 죽음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소중한 대의는 이 땅에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였다. 물과 성령으로 받은 세례는 하나님나라를 향한 아버지의 헌신의 확정이었으며, 이제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라고 부르심을 받은 거다. 모든 이를 위한 사랑과 평화와 용서는 강력한 무기로, 마음이 여리고 비겁한 이들이 아닌 용기 있는 신자들의 도구였다.
젊은 아버지
그로부터 딱 1년 뒤인 1966년, 아버지는 버레나 도나타 마이어와 결혼했다. 깊은 사랑에 빠진 두 젊은이는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10년 동안 나와 일곱 형제자매가 태어났다. 삶은 바빠졌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 시간을 내셨다. 아버지는 삶을 사랑하셨다. 아주 짓궃은 장난을 좋아하셨고, 뉴욕 양키즈를 좋아하셨다. 개를 좋아하셨는데 어렸을 때 텔이라는 이름의 잡종개를 기르신 이후 60년 동안 독일 셰퍼트 여섯 마리를 기르셨다
아버지의 야외활동을 향한 사랑은 식을 줄을 몰랐다. 땀흘려 장작을 패고 땔감을 옮기거나 퇴비를 옮긴 뒤에는 근처 연못에서 수영을 하는 보상이 따랐다. 캣츠킬 산을 오르기도 했고, 월킬 호수에서 낚시를 했으며, 사냥도 했다. 아버지의 전염성 강한 열정 덕분에 우리들도 이런 활동을 좋아하게 됐다. 아버지는 음악도 좋아하셨다. 특별히 바하, 베토벤, 멘델스존 같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셨고, 우리는 각자 악기를 하나씩 익혔다. 자주 이웃 가족들 초대하여 민요나 찬송, 또는 흑인영가를 부르며 저녁을 마무리하였다.
젊은 아버지
1972년 아버지는 브루더호프의 목사로 섬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당신 아버지도 목사로 부르심을 받았고, 1962년에는 브루더호프의 멤버들에게 공동체의 장로로 임명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출판사 일의 즐거움에 푹 빠져있었다. 목사가 되는 것은 아버지의 생각도 바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공동체는 아버지 안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목회적 은사를 인정했다. 그건 물론 당신의 아버지를 도와 숱한 시간 교회 식구를 상담하면서 연마하신 거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새로운 임무를 받아들이기로 동의하셨다.
아버지는 만나는 모든 사람과 연결점을 찾으셨다. 말하기보다는 듣는 편이셨고, 구체적인 충고를 하기보다는 종종 재치 있게 답변하셨고, 이해와 희망을 담은 말을 건네셨다. 아버지는 운동 경기를 할 때면 지치지 않은 코치이기도 하셨는데 축구 경기를 예로 들면 아무도 곁에 서서 구경만 할 수 없었고, 누구나 배울 수 있었으며, 아버지의 시야 안에 있다면 팀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교회 지도자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아버지의 어머니가 1980년에 암으로 돌아가셨고, 2년 뒤 당신의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브루더호프는 장로를 잃고 고통스러운 분열을 겪으며 분투했다.
용서에 필요한 용기와 겸손이 수년 간 시험에 빠졌다. 하지만 용서가 이겼다. 놀랍게도 서로 맞서던 이들이 화해했다. 1983년 아버지는 브루더호프의 장로로 임명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그 책임을 열정적으로 감당했다. 아버지는 늘 부드럽기만 하신 분이 아니었다. 직설적으로 핵심을 건드릴 줄 아는 분이었다. 이기주의가 한 사람의 신앙을 탈선시킨다고 느끼면 절대 대충 피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가장 먼저 질타하시고 가장 먼저 따뜻함과 신뢰로 제일 먼저 용서하시는 분이었다. 아버지는 무엇보다도 진실을 말하고, 회개를 통해 회복을 돕는 방식으로 사랑하는 일에 집중하셨다. 아버지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는 신경 쓰지 않으셨다. 나이 든 이들, 퇴역 군인, 기업가, 한때 흉악범이었던 이들, 마약중독자, 정서적으로 취약한 이들, 야망에 찬 대학원생들, 정치인들, 장애를 지닌 아이들, 반항적인 십대 등 아무든지 상관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고, 신뢰할 수 있는 조언을 어김없이 제공하셨다. 아버지는 밤이나 낮이나 만날 수 있는 분이었다. 새벽 5시 전에 첫 통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보내셨고, 밤 11시 넘어서도 자주 그러셨다. 누군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달려가 곁을 지키신 적이 많았다.
해가 거듭할수록 아버지의 친구는 몇 배씩 많아졌지만, 적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논쟁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마음에 담긴 말을 하셨다. 마찬가지로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을 존중했다. 한 예로 2년전 아버지는 우리 지역의 상원 의원을 초대해 최근에 뉴욕주의 결혼 평등법에 찬성한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전통적 결혼을 옹호하는 우리 교회 멤버들과 그 정치인 사이에 열띤 논쟁이 이어졌다. 논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아버지가 구조에 나섰다. “충분히 얘기했습니다. 아이스크림 좀 돌리고, 삶을 축하하지요. 그리고 올버니에서 온 우리 형제와 이렇게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것도 축하합시다.”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서로 존중하고 상대방의 선의와 인간존중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의견은 존중하셨지만, 어떤 사람이 적대감을 품고 몰아부칠 때 아버지는 물러서지 않으셨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상황을 즐기신 건 아니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사실임을 확인해준 이들에게 혼잣말로 감사하곤 하셨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눅 6:26). 불가피하게 아버지도 실수를 하셨고 그걸 제일 먼저 인정하셨다. 때로는 아버지가 내린 과감한 결정 때문에 또는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관대하게 신뢰한 일 때문에 혼자서 모든 비난을 받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즉흥적이고 대담한 시도를 좋아하셨기 때문에 장로로 임명되고 나서 여러 모험적 일을 시작하는 걸 도우셨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는 브루더호프와 후터형제회가 협력하는 여러 일을 주도하셨다. 두 공동체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인연을 이어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관계는 1994년에 끝이 났는데, 가장 큰 이유를 들자면 아버지가 교회 지도자들이라면 누구보다도 더 회개와 거듭남에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고, 그것이 교회 일치의 유일한 기초라고 주장하셨기 때문이다.
그 사이 2개 대륙 4개 공동체가 있던 브루더호프는 4개 대륙에 26 공동체로 자랐다. 2000년대 초부터 아버지는 도시에 작은 공동체를 시작하는 일을 장려하셨다. 또 공동체가 재난 지역에 긴급 구조 장비와 인원을 파견하고, 지역의 재활을 위해 벌이는 새로운 사업을 보조하는 노력을 열정적으로 뒷받침하셨다. 아버지는 늘 어머니와 함께 많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셨고, 그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셨다. 또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셨고, 그들 자신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기여하도록 힘을 주셨다.
복음 선포
1996년에 아버지의 첫 책이 출간됐고, 이어 11권이 더 나왔다. 평생 글쓰기를 좋아하신 아버지는 실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당신의 생각을 표현하기를 즐기셨다. 그리고 그런 실제 이야기를 통해 용서, 결혼, 자녀 양육, 교육, 기도, 두려움, 희망, 죽음, 노년, 평화 찾기 등의 주제를 다루셨다.
아버지에게 글쓰기는 공동 작업이었다. 아버지는 당신이 쓰는 주제와 관련한 공동체 식구들의 실제 이야기나, 직관, 일화를 들려달라고 부탁하셨다. 글감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하셨지만, 무엇보다도 공동체 식구들이 참여하고, 시각을 넓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아버지의 두꺼운 원고지 묶음에는 손으로 쓴 생각과 메모가 가득했다. 아버지는 믿음직스러운 편집팀을 구성하셨지만, 언제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셨고, 매 과정을 꼼꼼이 챙기셨다. 아버지 책의 편집자로 일하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지만, 편집자들은 아버지의 겸손과 열정, 언제나 제안과 변화를 받아들이는 태도로 보상을 받았다.
아버지의 책들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그중 《왜 용서해야 하는가》는 특히 널리 읽힌 책이다. 이 책에 담긴 용서의 메시지는 복음의 중심을 향해 있으며 실제로 많은 사람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부모님은 세계 곳곳을 다니셨다. 이것은 세계 곳곳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장로로서 해야할 일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사람들의 필요, 기쁨, 슬픔에 관해 배울 이러한 기회를 소중하게 여기셨고, 그때마다 사람들의 내면이 참으로 비슷하다는 것을 경이로워하셨다.
책을 출판하게 되면서 아버지는 미국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열린 종교, 평화 컨퍼런스에 강사로 초대받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부모님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라크, 쿠바, 남아프리카공화국, 멕시코, 르완다 등을 방문하셨다. 같은 시기에 브루더호프는 재해로 폐허가 되거나 전쟁에 짓밟힌 지역에 인도주의적 구호와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다. 아버지도 이 일에 참여하셔서 아이티, 태국, 중미, 남미, 아프리카, 중동 지역을 찾으셨다. 이런 일을 하시던 중에 1996년 테레사 수녀를 만나셨다. 아버지는 그 만남에 대해 이렇게 쓰셨다. “테레사 수녀는 내게 간곡히 호소했다. 가난한 사람 중에 제일 가난한 사람과 함께하라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찾을 수 있다고. 가난한 사람 중에 제일 가난한 이들을 섬긴 모범을 찾는다면 나는 테레사 수녀님과 사랑의 선교회가 바로 그들이라고 말하겠다.”
아버지는 가난한 이들과 마음을 함께 하셨지만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 즉 평판이 좋은 지도자들과 나쁜 지도자들을 모두 놓치지 않으셨다. 이라크를 방문해서는 사담 후세인의 외무장관이며 기독교 신자인 타리크 아지즈를 만나 함께 기도했다. 쿠바에서는 피델 카스트로와 대화를 나누면서 종교의 자유가 중요함을 강조하셨다. 클린턴 대통령이 르윈스키 스캔들에 연루되었을 때는 편지와 함께 책 《왜 용서해야 하는가》를 보내셨는데 그 뒤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회개와 용서, 변화한 삶을 위한 부르심에 관한 생각을 교환하셨다. 훗날 자서전에서 클린턴은 이때 한 서신 교환이 중요했다고 회고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브루더호프는 평화와 정의를 위해 일하는 많은 이들과 대의를 공유했다. 그중에는 ‘미국 농장 노동자 연합’을 이끈 세자르 차베스를 비롯해 구호단체 ‘사마리탄 퍼스’의 프랑클린 그레이엄, ‘세이브 더 칠드런‘의 마크 슈라이버도 있었다. 아버지는 처크 콜슨과 함께 교도소 사역을 하셨고, 헬렌 프리진 수녀를 비롯한 다른 이들과 함께 사형제 폐지 운동을 하셨다. 1995년에는 뉴욕주 대주교 오커널과 친구가 되셨는데 그때부터 가톨릭 형제자매들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역사적 분열을 극복하는 복음의 힘을 주창하셨다. 아버지는 또한 훗날 교황 베네딕토 16세가될 요셉 라트징어와 결혼과 가족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셨다. 이런 인연으로 2004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나기도 하셨다.
이 시기에 아버지는 훗날 아버지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일의 시작이 될 새로운 관계를 맺으셨다. 1997년 아버지는, 센트럴 파크에서 경범죄 검문을 하던 중 총에 맞아 전신마비가 된 뉴욕시 경찰국 스티븐 맥도널드 경위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스티븐은 자신을 쏜 15살 소년을 공개적으로 용서했고,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격려하고 위로했다. 그 사연에 감동받은 아버지는 롱 아일랜드로 찾아가 스티븐을 만났다. 스티븐과 아버지는 믿음과 용서가 지니는 위력에 동감해서 문제에 빠진 청소년에게 힘을 주기 위한 일을 계획했다.
이 동반관계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먼저 두 사람은 1999년에 가톨릭과 개신교가 충돌하고 있는 북아일랜드로 갔다. 이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방문했는데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의회와 국방부 본부에서 발언했다. 두 곳에서 아버지와 스티븐은 갈등과 증오, 폭력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화해와 용서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곧 아버지와 스티븐이 해외에서 얻은 경험이 국내에서 필요하게 되었다. 1999년 4월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은 학교 폭력의 증가를 예고했다. 그러자 아버지와 스티븐은 용서의 메시지를 학교에 전하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이 시작한 ‘브레이킹더사이클’ 프로그램은 수천 학생들 가슴을 울렸다. 또 다양한 배경의 강연자를 한데 모았다. 개심한 전직 갱, 자살 피해자의 어머니, 알코올과 마약 중독 가족을 둔 이들이 한데 모여 강력한 삶의 증언을 나눴다. 용서의 메시지를 통해 희망과 치유를 제공하고, 건설적인 선택의 본을 보이는 브레이킹더사이클 사역에 아버지는 깊은 열정을 품고 많은 시간을 쏟아부으셨다.
황금기
언제나 앞서 생각하시던 아버지는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시던 2001년에 리처드 스콧 형제에게 브루더호프 장로의 역할을 인계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아버지는 공동체의 지도력 개발을 이끌어 가실 수 있었고, 새로운 형태의 섬김(종종 놀라운 형태의)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얻으셨다.
많은 이들은 왜 평화를 사랑하는 아나뱁티스트 목사가 경찰 사목이 됐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만약 25년 전이었다면 아버지도 같은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너그럽고 개방적이셨던 아버지는 65세에 새로운 형태의 사역에 뛰어 드는 일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맥도널드 경위를 알게 되면서 경찰관들이 무척 힘든 일, 즉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동시에 평화를 지키는 사람이 되는 일을 수행하고 있으며 기도와 지지가 필요함을 이해하게 되셨다.
얼스터 카운티 경찰서와 얼스터 경찰서장 협의회의 사목으로서 아버지는 힘든 일을 처리해야 하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함께 기도했으며, 아픈 가족들을 방문하고, 장례식을 치르며, 결혼하는 이들과 새로 태어난 아기를 축복했다. 아버지는 ‘미식의 예식’인 관할 경찰서 바비큐 행사를 즐겁게 준비하셨고, 그때는 별다른 설교를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기도를 소홀히 하지는 않으셨다. 어느 날 아버지는 한밤중에 젊은 경찰관이 치명적인 교통사고로 실려간 응급실로 호출을 받았다. 그곳에서 경찰서장 대리는 제복을 입고 엄숙하게 있는 경찰관들 사이로 아버지를 안내했고, 아버지는 죽어가고 있는 젊은 경찰관 곁에서 기도했다. 한 경찰관은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마치 모세가 바다를 가르는 것 같았어. 자네 아버지는 조용한 권위와 사랑으로 그 경찰관에게 성큼성큼 걸어가서 확신과 평화를 주셨다네.”
사실 경찰 사목으로 일한 것은 수십년 동안 교도소 사역을 하신 것을 생각하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어느 사람과 함께 있든지 마르지 않는 저수지처럼 공감하는 마음을 쏟아부으셨다. 사실 이것은 아버지가 사랑하신, 문학의 거장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우신 교훈이다. 나는 어느 날 밤 교도소 동료 사목의 호출로 한 수감자를 만나러 가는 아버지와 동행한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이를 무참하게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체포당한 그 남자는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아버지는 가짜 위로의 말을 하지도 않고, 끔찍하게 저지른 범죄를 가볍게 여기지도 않으셨다. 그저 가장 악한 죄도 용서하실 수 있는 예수님에 관해 말해주셨다. 그 수감자는 범죄를 자백하고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몇 년 후 주립 교도소에 있을 때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 오늘 날까지 그 남자는 아버지가 그 운명의 밤에 건네주신 성경책을 소중하게 품고서 동료 수감자들을 섬길 때 사용하고 있다.
2006년에 받은 심장 수술은 아버지의 활동에 타격을 주었지만, 민첩한 생각과 영혼을 건들지 못했다. 부모님은 서로 상대를 보완해온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더 떼어놓을 수 없는 깊은 관계가 되셨다. 딸 마그릿이 암으로 죽고 어머니마저 같은 암에 걸려 긴 싸움을 하게 된 일은 우리 가족을 시험했다.
2014년 11월 부모님은 바티칸의 초청으로 로마에서 후마눔 콜로키움이라는 모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다른 여러 종교 지도자들, 학자들과 함께 발언하셨다. 후마눔 콜로키움은 결혼의 신성함을 주제로 여러 나라의 서로 다른 종교인들이 모인 회의였다.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종교를 대표하는 수백 명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실한 결혼은 우리가 인류를 섬기는 아름다운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결혼은 사적인 계약 이상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원래 창조의 일부이며 모든 세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대로 존재하도록 거룩하게 해줍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처럼 우리도 더 용감해져서 단순함과 실제적인 도움으로 주류 문화에 반기를 들어야 합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로마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그리고 아이들에게 신실함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오늘 우리도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전투
아버지의 마지막 전장은 지난 3월에 진단 받은 암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멈추지 않으셨다. 틈틈히 아주 짧게 쉬면서 상담이 필요한 이들과 함께하고,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찾아가고, 브루더호프 학교들을 찾아가 학생들을 만났다. 그리고 오후에는 허드슨 강변으로 차를 몰고 가서 들과 숲, 야생 동물들을 살핀 다음에 돌아오는 길에는 동네 식당에 들려 카푸치노를 주문하셨다. 하지만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은 저녁에 열리는 교회 모임들이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단순한 믿음을 지키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회개와 고백을 통해 마음을 죄에서 자유롭게 하라고 하셨다. 용서하고 원한을 품지 말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죽음을 향한 두려움을 솔직하게 고백하시면서도 복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는 것이 무기이며 평생 해야 하는 것이라고, 필요 이상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돌아가시기 6일전인 종려주일에 아버지는 공동체 모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진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우리 중 아무라도 자그마한 역할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뛰어나거나 위대해서가 아니라 자비로운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줄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수난 금요일에 아버지는 구주의 수난, 그분의 고통을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날 아버지는 별로 말씀이 없으셨다. 대부분의 시간 아버지는 현실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셨지만 또렷하고 따뜻한 눈빛과 미소로 작별을 고하셨다. 나는 아버지께 브루더호프, 우리 가족, 그리고 내 삶의 미래에 필요한 지혜의 말씀을 부탁 드렸다. “진실해라.” 아버지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날 아버지는 골고다의 길을 걸으셨다. 생명의 문인 십자가에 이르기 위해 산을 오르셨다. 우리는 그 곁을 지켰다. 힘겨웠지만 영광스러운 시간이었다. 용사는 물러나지 않으며 항복하지도 않는다. 눕지도 않는다. 성토요일이 밝아오면서 아버지는 혼수상태에 빠지셨다. 그리고 몇 시간 후에 아버지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는 사이에 마지막 숨을 내쉬셨다. 아버지의 몸은 평온했고, 영혼은 자유를 얻었다. 아버지의 눈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마무리
몇 년전 아내와 나는 부모님과 함께 유럽에서 우리 교회와 가족 역사의 뿌리를 찾는 여행을 했다. 하루는 이탈리아 북부 돌로미테 지방의 급한 경사길을 올랐다. 16세기에 이곳에서 아나뱁티스트가 번성했고,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높은 고도와 험한 지형 때문에 힘들어하셨다. 그때 일행 중 한 사려 깊은 한 젊은이가 물푸레나무 덤불로 들어가 가느다랗지만 단단한 가지를 잘라서 아버지에게 건냈다. 끝이 자연스럽게 굽은 것이 아버지 손에 딱맞는 지팡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 지팡이는 늘 아버지와 동행했다. 걸으면서 아버지는 땅과 소통하셨다. 어느 땅을 밟든지 그곳의 삶과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는 모든 곳이 거룩한 땅이었다. 지팡이는 단순한 안전과 보호, 권위의 상징이었다. 우리는 그런 아버지이자 장로이신 분에게 기댔다. 그리고 아버지가 가르치신 대로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에게 기대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분에게 더 기댈 것이다.
조문 기간 내내 아버지는 다음 여행을 위해 잠시 쉬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 손에는 늘 그랬듯이 지팡이가 있었다. 평화로운 그림이었다.
그렇다. 평화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삶을 산 뒤에 누리는 안식이다. 하지만 최초의 행동은, 즉 모든 행동과 희망의 원천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하신 행동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구속과 용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6). 아버지는 이 믿음대로 살고 행동하셨다.
방은 고요에 잠겼다. 평화를 위해 오랜 싸움을 한 두 사람이 마주했다. 한 사람은 이 세상을 보고, 다른 사람은 다음 세상을 보았다. 살아있는 용사 존 퍼킨스는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더니 말문을 열었다. “모든 인종과 문화 장벽을 극복하고 하나 됨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을 보려고 했던 아버지의 소망과 노력을 곁에서 지켜보는 건 나와 가족에게 큰 기쁨이었어요. 그 일은 이루어질겁니다. 다음 세대가 그렇게 하고 말거예요. 여러분과 함께 저도 슬퍼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교제와 사랑이 앞으로 계속 나아가고 더욱 강력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사랑과 선한 일을 이어나가세요. 이 세상에 있는 상처 입은 이들에게 계속 다가가세요. 여러분의 아버지는 우리가 함께 이 일을 하기를 바라실 겁니다.”
예, 아버지, 계속 가겠습니다. 계속 진실하게 있겠습니다.
이 글을 쓴 J. 하인리히 아놀드 2세는 의사이며, 교사, 목사다. 가족과 함께 뉴욕주 북부에 위치한 우드크레스트 브루더호프에 살고 있다.
사진 제공: 저자